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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한국사, 코리아히스토리월드, 1555-0001 &amp;gt; 근대사 &amp;gt; 김홍집</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김홍집 (2026-08-31 12:15:3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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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김홍집과 개화파가 무너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8</link>
<description><![CDATA[<p>1896년 2월, 김홍집 내각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를 파견한 틈을 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어요(아관파천, 俄館播遷).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졌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강해졌으며 김홍집 내각도 무너지고 말았어요.</p><p><br /></p><p>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개화파 대신들을 해임하고는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김홍집은 성난 백성들에게 그만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어요. 김홍집의 죽음으로 조선의 정치권에서 개화파는 사실상 몰락했고 이들이 주도한 개혁도 멈췄어요.</p><p><br /></p><p>한편 김홍집은 순종에 의해 새롭게 평가받으며 사면을 받았어요. 사람들도 이에 공감하고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어요.</p><p><br /></p><p>김홍집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떴어요. 무엇보다 유능한 관리이자 외교가로 뛰어난 활동을 했어요. 특히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으로 어려웠던 국내외 상황에서 나라의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위해 개혁을 이끌었지요.</p><p><br /></p><p>다만 김홍집이 지나치게 일본의 힘을 빌려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과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가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고 있어요.</p><p>여러분은 김홍집을 공부하면서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나요? 김홍집이 노력한 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여러분이 만약 그 시대에 김홍집이었다면 어떤 선택들을 하였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15:3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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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을미개혁을 추진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7</link>
<description><![CDATA[<p>1895년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어요. 일본의 포학무도함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높아져 갔고, 서구 열강들의 비난도 거세졌지요.</p><p><br /></p><p>국내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더욱 힘을 쏟았어요. 이때가 1895년 을미년이었기 때문에 이를 ‘을미개혁’이라고 해요.</p><p>김홍집 내각은 교육이 개화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이어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근대적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지요. 그리하여 우선 경성 안에 근대적 소학교를 세워 아동을 교육하는 데 힘쓰도록 하였어요.</p><p><br /></p><p>또한 김홍집 내각은 1895년 11월 17일(양력 1896년 1월 1일)부터 태양력을 사용한다고 선포하였어요. 또한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한다고 전 국민에게 공표하였어요. 실제 고종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세자와 함께 머리카락을 자른 뒤 양복을 입고 조정에 나아갔어요.</p><p><br /></p><p>단발령은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이에요. 조선 사람들에게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사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단발령이 부모에 대한 불효이자 그동안 지켜온 전통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라 생각했지요.</p><p><br /></p><p>유학자 최익현도 단발을 강요하려고 하자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하며 거부하였지요.</p><p><br /></p><p>하지만 조선 정부는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도 단발령을 강력히 밀고 나갔어요. 이미 백성들은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단발령 강행은 민심을 극도로 나쁘게 만들었지요. 마침내 백성들의 반일, 반정부 감정은 폭발하였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6060_3334.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6060_3334.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6060_3334.png" /><br style="clear:both;" />단발령 시행 모습</p><p>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14:3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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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갑오개혁을 추진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6</link>
<description><![CDATA[<p>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어요. 동학농민운동이 진정되지 않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어요. 이를 빌미 삼아 일본도 덩달아 조선에 군대를 출동시켰지요. 일본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어요.</p><p><br /></p><p>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고종은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어요. 개혁을 담당할 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김홍집은 군국기무처 회의 총재가 되어 개혁(갑오개혁)을 시작하였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58_7277.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58_7277.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58_7277.png" /><br style="clear:both;" />대신들을 임명하는 칙령</p><p>독립기념관 제공</p><p><br /></p><p><br /></p><p><br /></p><p>갑오개혁으로 관직제도가 개편되면서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어요. 그리고 박정양·김윤식·어윤중·유길준 등 온건 개화파와 젊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함께 내각에 참여하였지요. 이들은 대부분 일본의 개혁을 따라해 조선도 일본처럼 부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p><p>김홍집은 내각의 우두머리로 근대 국가 형성을 위해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어요. 그들은 먼저 입헌 군주제를 모범으로 삼아 왕실의 일은 궁내부라는 관청을 만들어 따로 담당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업무는 의정부에서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88_7305.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88_7305.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888_7305.png" /><br style="clear:both;" />궁내부 현판</p><p>국립중앙박물관</p><p><br /></p><p><br /></p><p><br /></p><p>갑오개혁으로 왕실의 일과 나랏일이 분리되었어요. 또한 의정부 아래에는 내무아문·외무아문·탁지아문(재정 업무)·법무아문·학무아문·공무아문·군무아문·농상아문 등 8아문을 두어 각 아문의 대신이 책임감을 갖고 나랏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어요. 이는 왕 중심이 아닌 정치 기구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대적 정치 체제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뜻해요.</p><p><br /></p><p>김홍집 내각의 개혁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신분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는 것이에요.</p><p>그리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뽑겠다고 밝혔어요. 또한 공·사 노비제를 모두 없애고 노비 매매를 금지했어요. 이 같은 개혁으로 조선은 법적으로는 평등 사회로 나아가게 되었어요.</p><p><br /></p><p>… 1. 문벌, 양반과 상인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1.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만 따르며 서로 만나는 절차를 따로 정한다. … 1.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p><p><br /></p><p>-『고종실록 』 31권, 고종 31년 6월 28일 계유</p><p><br /></p><p>또한 유교적 관리를 뽑는 제도였던 과거 제도도 전격 폐지하였어요. 그리고 『논어』, 『맹자』와 같은 유교 경전이 아닌 근대적 실용 학문을 기준으로 관리를 뽑았어요. 이제 조선 왕조를 지배하였던 유학은 공식적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지요.</p><p><br /></p><p>김홍집 내각은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바꾸기 위한 여러 정책을 빠르게 펼쳐 나갔어요. 바야흐로 세상은 천지개벽하듯 바뀌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이 강제로 시행되었다는 생각에, 일반 백성들은 개혁에 냉담하다 못해 시큰둥하였어요. 하지만 조선은 갑오개혁으로 인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데 한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935_1087.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935_1087.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935_1087.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12:2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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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조선책략』을 들여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5</link>
<description><![CDATA[<p>조선에 돌아온 김홍집은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국왕에 바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남하가 중국 및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우려하는 것이라는 것과 조선이 스스로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외교를 강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보고하였어요.</p><p><br /></p><p>고종은 김홍집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통리기무아문(대외 정책 및 군사를 비롯한 일반 관청업무 총괄)을 설치하고 그 통상 당상(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직)에 임명하였어요.</p><p>김홍집이 소개한 『조선책략』은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어요. 그리고 조선에는 개화 바람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지요.</p><p><br /></p><p>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책략』은 유생의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왔어요. 특히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유생들은 임금의 마음을 홀려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한 『조선책략』을 불태우고 김홍집을 처벌하라며 거세게 비난하였어요.</p><p><br /></p><p>결국 김홍집은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어요. 이로 인해 그의 입지는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07:23+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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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외교무대의 주역으로 활동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4</link>
<description><![CDATA[<p>1880년 김홍집은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수행원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어요. 일본에 개항하면서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쌀이 무관세로 일본에 유출되며 쌀값이 폭등하고 식량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지요.</p><p><br /></p><p>조선 정부는 불리하게 맺어진 강화도 조약의 개정을 의논하고, 일본의 국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한 것이었어요.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홍집 일행은 일본 측에 조선의 입장을 문서로 전달하였어요. 그러나 일본 측은 조선의 요구를 회피하는 작전으로 일관하였어요.</p><p><br /></p><p>김홍집은 일본과의 논의가 여의치 않자, 일본에 와 있던 청의 외교관 황쭌센(黃遵憲)을 만나 세계 정세와 일본의 내정, 외교 및 통상 문제 등 여러 가지 관심사를 논의하고 조언을 구하였어요. 이때 김홍집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하 『조선책략』)이란 책 한 권을 건네받았어요.</p><p>러시아가 이 지역의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대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p><p><br /></p><p>- 『조선책략』</p><p><br /></p><p>『조선책략』은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조선은 러시아 방어책으로 친중국·결일본·연미국 하는 것을 외교 노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p><p><br /></p><p>즉 중국과는 전통적 외교 관계를 다시 세우고, 일본과는 강화도 조약을 조정하여 관계를 굳건히 하며, 미국과는 새로 국교를 맺어 우방국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후 『조선책략』은 김홍집 외교 전략의 지침이 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543_4543.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543_4543.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5543_4543.png" /><br style="clear:both;" />청 외교관 황쭌센과 논의하는 김홍집</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05: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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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3</link>
<description><![CDATA[<p>1876년 정신적 지주인 박규수가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은 개화 세력은 두 파로 갈라졌어요. 한 파는 조선 사회가 중국의 자강운동(양무운동)을 모델로 하여 점진적으로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온건 개화파였고, 다른 한 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개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사회 개혁을 하루빨리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였어요.</p><p><br /></p><p>온건 개화파에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김기수·박정양 등이 있었어요. 이들 대부분은 개항 이후 나라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던 집권 세력에 속해 있었어요. 이들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조선이 시급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종교나 사상은 서양보다 동양이 더 우월하므로 굳이 본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어요.</p><p><br /></p><p>한편 급진 개화파에는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서재필(후에 참여) 등이 있었어요. 이들은 박규수가 사망한 뒤 유대치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급진적인 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어요.</p><p><br /></p><p>이들은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사상·제도·문화까지도 조속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어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 모두 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개화의 수용 방법이 달랐어요. 이 두 세력이 각각 조선의 정치 중심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조선의 운명도 달라지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03:5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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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개화사상을 배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2</link>
<description><![CDATA[<p>김홍집은 1842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는 성장하면서는 고전 한학을 두루 익히면서도 실학에도 관심을 갖고 여러 사람과 사귀었어요. 실학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한 새로운 경향의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에요.</p><p><br /></p><p>25살이 되던 1867년 김홍집은 성균관에 유생으로 들어가 바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일하였어요. 김홍집은 이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김영작으로부터 학문과 공직자의 태도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김영작은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개화파의 선구자인 박규수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어요.</p><p><br /></p><p>당시 박규수의 집은 오경석·유대치·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의 개화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김홍집도 이곳을 출입하며 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지요.</p><p><br /></p><p>1875년 김홍집은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 현감을 지내면서 일을 잘해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어요. 이후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2:03: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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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김홍집, 개화 정부를 이끌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hongjip/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4008_8463.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4008_8463.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44008_8463.png" /><br style="clear:both;" />군국기무소도</p><p>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p><p><br /></p><p><br /></p><p><br /></p><p>“지금 시무(時務)가 매우 급하고 사람들의 기대도 더욱 간절하니, 경은 즉시 명을 받고 개혁을 담당하여 처리하도록 하라.”</p><p><br /></p><p>“힘들고 어려운 때에 신이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신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루겠나이다.”</p><p>1876년 개항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김홍집은 개화만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김홍집이 선택한 개혁은 성공하였을까요? 그의 활동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1:40:2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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