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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한국사, 코리아히스토리월드, 1555-0001 &amp;gt; 근대사 &amp;gt; 김마리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김마리아 (2026-09-01 14:09:19)</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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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귀국 후 교육 활동에 힘쓰며,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7</link>
<description><![CDATA[<p>1932년 김마리아는 마침내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재판으로 선고받은 징역 3년의 시효가 끝나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본의 감시 속에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었어요.</p><p><br /></p><p>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고난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를 빗대어 일본의 지배를 받는 우리 민족의 상황을 설명하며 학생들의 애국심을 길렀어요.</p><p><br /></p><p>김마리아가 우리나라에 돌아오기 전인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차지했어요. 또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고 전쟁을 계속 확대했어요. 이에 일본은 우리 민족을 전쟁에 내몰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했어요.</p><p><br /></p><p>그중에는 일본 종교 사원인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을 강요하는 ‘신사참배’도 있었어요. ‘신사참배’는 기독교에서 금지하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교회 지도자 중에는 일본의 강요를 받아들여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김마리아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어요. 그러면서 기독교 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했어요.</p><p>일본의 식민 지배 시기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김마리아는 우리나라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하고 1944년 3월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p><p><br /></p><p>김마리아는 숨을 거둘 때 자신을 화장해서 평양 대동강 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래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묘소가 남아 있지 않아요. 김마리아를 좀 더 알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김마리아길’을 답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p><p><br /></p><p>‘김마리아길’은 서울 종로 5가에 그녀가 다녔던 연동교회에서 시작해서 김마리아의 활동 내용이 전시된 여전도회관까지 조성된 코스를 말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341_2541.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341_2541.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341_2541.png" /><br style="clear:both;" />김마리아 길 표지판(서울 종로구)</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4:09: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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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6</link>
<description><![CDATA[<p>상하이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그곳에 먼저와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고모들의 보살핌 속에서 점차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어요. 그 후 난징에 있는 진링대학에 입학해 못다 한 공부를 하면서 상하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어요.</p><p><br /></p><p>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어요. 임시의정원은 입법부에 해당하는, 지금의 국회와 같아요.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된 김마리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어요.</p><p><br /></p><p>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직이 크게 흔들렸어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3년 국민 대표 회의를 개최했어요.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김마리아와 달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났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056_5814.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056_5814.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056_5814.png" /><br style="clear:both;" />김마리아(왼쪽)가 안창호(중앙), 차경신(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p><p>독립기념관</p><p><br /></p><p><br /></p><p><br /></p><p>이 모습을 지켜본 김마리아는 상하이를 떠나 미국에 가기로 했어요. 못다 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서였죠. 미국에는 삼촌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안창호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p><p><br /></p><p>김마리아는 1923년 미국에 도착하여 9년 동안 살면서 파크대학, 시카고대학교, 콜롬비아대학교, 뉴욕신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미국에서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근화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p><div><div>근화회는 출판과 강연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고통받는 조선인들의 처지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예요.</div><div><br /></div><div><br /></div><div><br /></div><div><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165_6709.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165_6709.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9165_6709.png" /><br style="clear:both;" />김마리아</div><div>정신여자고등학교</div></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4:06:19+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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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았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5</link>
<description><![CDATA[<p>김마리아를 비롯한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1919년 11월 정신여학교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보내졌어요. 같이 활동하던 오현주가 남편의 말을 듣고 남몰래 애국부인회의 활동을 일본 경찰에 알렸기 때문이지요. 이때 김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받아서 큰 병에 걸렸어요. 일본은 할 수 없이 1920년 5월 김마리아를 풀어준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859_8356.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859_8356.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859_8356.png" /><br style="clear:both;"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는 김마리아</p><p><br /></p><p><br /></p><p><br /></p><p>김마리아는 대구에 있는 한 목사의 집에 머물며 병을 치료하려 했어요. 하지만 좀처럼 병이 나아지지 않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요. 김마리아는 병든 몸으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힘들게 재판을 받았고, 재판 결과 징역 3년을 받았어요.</p><p><br /></p><p>다시 감옥에 가야만 될 상황이 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1년 7월 사람을 보내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켰어요. 인천에서 출발한 김마리아는 상하이까지 가는 데 한 달이나 걸렸어요. 뱃멀미와 고문 후유증 때문에 바로 상하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4:01:17+09:00</dc:date>
</item>


<item>
<title>3·1 운동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4</link>
<description><![CDATA[<p>부산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대구를 거쳐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는 큰언니와 고모가 살고 있었거든요. 김마리아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여러 장 복사한 후 서울로 가져갔어요.</p><p>그 무렵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김마리아는 3월 2일 이화학당에서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만났어요. 앞으로 독립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p><p><br /></p><p>“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남학생들은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여학생들도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p><p><br /></p><p>여성이 중심이 되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김마리아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부인 단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러나 부인 단체를 만들려는 그들의 결심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3월 6일 김마리아가 3·1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지요. 김마리아는 이때 심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갇혀 있다가 7월 24일이 돼서야 가석방되었어요.</p><p>그 무렵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김마리아는 3월 2일 이화학당에서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만났어요. 앞으로 독립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p><p><br /></p><p>“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남학생들은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여학생들도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p><p><br /></p><p>여성이 중심이 되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김마리아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부인 단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러나 부인 단체를 만들려는 그들의 결심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3월 6일 김마리아가 3·1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지요. 김마리아는 이때 심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갇혀 있다가 7월 24일이 돼서야 가석방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706_9695.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706_9695.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706_9695.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김마리아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는 큰 변화가 생겼어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이죠. 그러자 국내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하는 단체가 하나둘씩 생겨났어요. 그중에는 ‘혈성애국단부인회’,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처럼 여성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있었어요.</p><p><br /></p><p>‘혈성애국단부인회’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들어진 비밀여성단체로 김마리아와 같이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한 오현주가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이 단체는 3·1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일과 같이 옥바라지와 같은 일을 했어요.</p><p><br /></p><p>‘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1919년 4월에 만들어졌어요. 최숙자, 김원경 등 기독교계 여성들이 만든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했어요. 또 5월에는 김원경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내기도 했어요.</p><p><br /></p><p>두 단체는 각각 나뉘어 활동을 하다가 대한청년외교단의 이병철의 제안으로 하나로 합쳤어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예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장은 오현주가 맡았지만 곧 사임하여, 회원들은 1919년 10월 정신여학교에 모여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선출했어요.</p><p><br /></p><p>“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p><p>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기존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즉 이전처럼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보내는 활동만 할 것이 아니라 독립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던 재무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결사부와 적십자부를 새로 만들었어요.</p><p><br /></p><p>특히 적십자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독립 전쟁을 하게 되면 발생하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대한민국적십자회를 조직하자는 판단에 따라 만든 것이에요. 김마리아의 지도력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원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만주와 하와이에도 지부가 설치되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3:58: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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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2·8 독립선언에 참여했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3</link>
<description><![CDATA[<p>도쿄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고모인 김필례가 공부하고 있던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에 입학했어요. 이후 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던 김마리아는 1917년에 ‘동경여자대학생친목회’ 회장이 되었어요.</p><p><br /></p><p>당시 일본에는 남녀 유학생들이 함께 모여 활동하던 ‘조선유학생학우회’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이 단체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단결을 목적으로 세워져 항일 의식을 키워나가며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었지만,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었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공부하는 여자 유학생들이 새롭게 ‘동경여자대학생친목회’를 만들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1대 회장인 고모 김필례가 1916년 정신여학교 교사로 가게 되면서 김마리아가 회장을 맡게 된 거에요.</p><p><br /></p><p>김마리아는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친목회의 조직을 정비했어요. 일본 각지에 ‘동경여자대학생친목회’와 뜻을 같이하는 모임을 만들고 그 지역에서 활동하게 했어요. 그리고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 『여자계』라는 잡지를 만들고 활발하게 활동을 펼쳤어요.</p><p>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하나둘씩 도쿄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들었어요.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 주고자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이를 발표하기 위해 모인 거예요. 600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결의문도 발표되었어요. 김마리아도 이곳에 참여했어요.</p><p><br /></p><p>“2·8 독립선언서를 조선으로 가져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p><p><br /></p><p>이렇게 결심한 김마리아는 2월 17일 차경신과 함께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녀는 일본 여자들이 입는 기모노의 커다란 띠(오비) 속에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꽁꽁 감추고 부산항에 도착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406_4809.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406_4809.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406_4809.png" /><br style="clear:both;"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는 김마리아</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3:53:4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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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김마리아가 와서 살교사로 근무하다 일본에 공부하러 갔어요</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2</link>
<description><![CDATA[<p>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송천리(소래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소래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곳이라고 해요. 김마리아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은 기독교를 믿었고, 소래마을에 교회가 세워질 때 큰 역할을 했어요.</p><p><br /></p><p>그녀의 집안은 아버지가 교회 부속으로 초등학교를 세울 정도로 넉넉한 편이었어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3살 때, 어머니는 14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김마리아는 삼촌과 고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어요.</p><p><br /></p><p>1896년 김마리아는 아버지가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 사상과 신학문을 배웠어요. 1905년에는 서울로 가서 연동여학교(현재 정신여자중학교)에 다니며 공부했어요. 1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대학까지 가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에요.</p><p><br /></p><p>김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살았어요.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최초 의사면허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1년 중국 서간도 지역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고, 내몽골로 건너가서는 병원을 열어 한인들을 치료해주던 독립운동가였지요.</p><p>김마리아가 와서 살 무렵, 김필순은 신민회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그의 집에는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수시로 드나들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생활하던 김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 운동을 접할 수 있었어요.</p><p><br /></p><p>1910년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그 후 큰언니가 근무하던 광주 수피아여학교로 내려가 교사로 근무했어요. 1912년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 기회가 생겨 1년 동안 히로시마에 있는 여학교에서 공부했어요.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루이스 교장의 요청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와 정신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5년 다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177_0368.png" title="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177_0368.png" alt="c323c28a4b4a5eb44a2be744a290e533_1788238177_0368.png" /><br style="clear:both;" />옛 정신여자고등학교 본관(서울 종로구)</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3:50:13+09:00</dc:date>
</item>


<item>
<title>3·1 운동을 널리 퍼뜨린 김마리아</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immaria/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5150af1e0f64374eeb09dbe2522f6ebf_1788235522_8695.png" title="5150af1e0f64374eeb09dbe2522f6ebf_1788235522_8695.png" alt="5150af1e0f64374eeb09dbe2522f6ebf_1788235522_8695.png" /><br style="clear:both;" />김마리아 동상(서울 종로구)</p><p><br /></p><p><br /></p><p><br /></p><p>“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더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겁니다.”</p><p><br /></p><p>위와 같은 말을 한 분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 선생이에요. 안창호 선생이 이렇게 말한 김마리아는 어떤 분일까요? 그녀는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1T13:05:5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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