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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한국사, 코리아히스토리월드, 1555-0001 &amp;gt; 현대사 &amp;gt; 우리나라 정부의 통일 노력</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우리나라 정부의 통일 노력 (2026-09-03 02:11:31)</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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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 속 작은 이야기: 기념식 때 불리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6</link>
<description><![CDATA[<p>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 때 불리는 노래가 있어요.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에요. 1984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과 들불 야학에서 활동했던 노동 운동가인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있었어요.</p><p>이때 사용하려고 만들어진 추모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에요.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뫼빗나리〉의 일부를 고쳐 노랫말을 만들었지요. 사람들은 이 노래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 축가라고 이야기해요. 현재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 때 불리고 있답니다.</p><p><br /></p><p>5·18 민주화 운동 현장을 돌아보니 당시의 공포스러웠던 모습과 계엄군에 맞서 하나 되어 싸웠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떠오르지요. 또한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지요.</p><p><br /></p><p>우리는 앞으로도 그들의 희생과 바람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해요. 또 광주 시민들이 소망했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답니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9074_7742.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9074_7742.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9074_7742.png" /><br style="clear:both;" />윤상원과 박기순 묘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2:11:3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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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이 된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5</link>
<description><![CDATA[<p>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물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병원 진료 기록, 기자들이 찍은 사진 필름, 학생들의 일기장…</p><p>유네스코는 2011년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한다고 발표했어요. 국가 폭력에 저항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광주 시민들의 희생과 그 가치를 국제 사회가 인정한 것이지요.</p><p><br /></p><p>무엇보다 여러 기록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한국판 ‘안네의 일기’로 이야기되는 주소연 학생의 일기예요. 주소연 학생은 당시 광주여고 3학년 재학생이었지요.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무섭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날의 일들을 기록했던 거지요.</p><p><br /></p><p>민주화에 성공한 시민들의 기록물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은 찾아보기 힘든 경우예요. 광주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구 도청 앞~금남공원 사거리(518m)를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정하였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2:09:2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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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5·18 민주 묘지</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4</link>
<description><![CDATA[<p>5·18 민주화 운동 당시 죽어간 사람들의 시신들이 거리에 나뒹굴었어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지요.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은 망월동(구 묘역)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어요. 그리고 그곳에 그들을 묻어주었지요.</p><p><br /></p><p>이후 1993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에 새로운 묘역이 만들어지고 민주화의 성지로 조성되었지요. 지금 이곳에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680여 명의 묘와 1987년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분들의 묘가 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878_6927.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878_6927.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878_6927.png" /><br style="clear:both;" />국립 5·18 민주묘지</p><p>국립 5·18 민주묘지 관리소</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2:08:2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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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시민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 주던 양동시장</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3</link>
<description><![CDATA[<p>5·18 민주화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신군부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이에요. 시민군은 버스에 나누어 타고 거리를 내달리며 계엄군에 맞섰어요. 택시들은 환자들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고요. 전남대학교 병원을 비롯한 여러 병원에는 피 흘리는 시민들로 가득했어요.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헌혈을 하겠다고 줄을 섰지요.</p><p>아주머니들은 집에서 가마솥을 들고나와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건네주었어요.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 주던 곳이 바로 양동시장이에요. 나눔의 정신이 담긴 주먹밥은 이후 5·18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686_4752.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686_4752.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686_4752.png" /><br style="clear:both;" />주먹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714_951.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714_951.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714_951.png" /><br style="clear:both;" />양동시장</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2:05:33+09:00</dc:date>
</item>


<item>
<title>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금남로 거리</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2</link>
<description><![CDATA[<p>광주의 금남로 거리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곳이에요. 당시 30여 만 명의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이 거리로 나왔어요. 여러 대의 버스에 탄 시민군이 계엄군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498_2036.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498_2036.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498_2036.png" /><br style="clear:both;" />금남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군</p><p>5·18기념재단</p><p><br /></p><p><br /></p><p><br /></p><p>거리에 모인 시민들은 “전두환은 물러가라!”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라고 목 놓아 외쳤어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기도 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528_1416.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528_1416.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528_1416.png" /><br style="clear:both;" />현재 금남로 일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2:02:20+09:00</dc:date>
</item>


<item>
<title>시민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옛 전남도청</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1</link>
<description><![CDATA[<p>10여 일 가까이 계속된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수많은 시민군들이 옛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계엄군에 맞서 싸웠어요.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며 계엄군에 저항했던 시민들은 결국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왔어요.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등 많은 청년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지요. 옛 전남도청은 현재 5·18 민주평화기념관이 되었어요. 이곳에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료와 기록물이 전시되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364_9279.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364_9279.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364_9279.png" /><br style="clear:both;" />5·18 민주평화기념관(옛 전남도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59:41+09:00</dc:date>
</item>


<item>
<title>학생들이 계엄군과 맞섰던 전남대학교</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0</link>
<description><![CDATA[<p>1980년 5월 18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전남대학교 교문 앞이에요. 당시 계엄군들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이곳에서 대치하고 있었지요.</p><p><br /></p><p>“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p><p>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저항하자 군인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어요. 그러면서 5·18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거예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074_2655.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074_2655.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074_2655.png" /><br style="clear:both;"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 중인 학생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162_4549.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162_4549.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8162_4549.png" /><br style="clear:both;" />전남대학교 정문</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56:14+09:00</dc:date>
</item>


<item>
<title>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9</link>
<description><![CDATA[<p>1979년 10월 26일 독재 정치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서 죽임을 당했어요. 광주 시민들을 비롯한 온 국민들이 이제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어요.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 된 새로운 군인 세력(신군부)이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꿈은 곧 깨지고 말았어요. 그들은 국가 비상사태 때 군인들로 질서를 유지하도록 한 법령인 비상계엄령을 통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어요.</p><p><br /></p><p>“비상계엄 해제하라!”</p><p><br /></p><p>“군인들은 물러가라!”</p><p>이에 맞서 서울, 부산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지요.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광주의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는 학생들과 계엄군들이 서로 맞서고 있었어요.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군인들이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그들을 잡아갔어요.</p><p><br /></p><p>이 소식을 전해 들은 광주 시민들은 분노에 차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어요. 계엄군들은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탄압을 저질렀어요. 길 가던 죄 없는 시민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심지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지요. 심지어 전재수 어린이처럼 앞동산이나 저수지에서 놀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죽은 어린이들도 있었지요. 장갑차가 도로에 가득했고, 탱크 부대도 동원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57_707.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57_707.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57_707.png" /><br style="clear:both;"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광주 시민들</p><p>5·18기념재단</p><p><br /></p><p><br /></p><p><br /></p><p>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하나둘 쓰러져 가자, 어른들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도 시민군이 되어 총을 들었어요. 자발적으로 모인 광주 시민들은 모두 힘을 모아 하나가 되었어요. 그들의 바람은 계엄군에 맞서 광주를 지키고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것 오직 하나였어요.</p><p><br /></p><p>광주에서 이렇게 끔찍하고 힘겨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다른 지역에서는 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계엄군이 광주 지역을 둘러쌓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했거든요. 뉴스에서는 폭도들에 의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가짜 뉴스만 흘러나왔고요. 광주 시민들은 큰 어려움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지만, 결코 의지를 꺾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어요. 10여 일간 지속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무려 200여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죽고, 많은 이들이 다치고 실종되었어요. 결국 무자비한 계엄군에게 시민군은 진압되었고, 5·18 민주화 운동도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어요.</p><p><br /></p><p>1980년 이후 광주 시민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결코 그날을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다행히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 점차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졌어요. 당시 삼엄한 경비를 뚫고 광주 시내로 들어가 당시 상황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낸 독일인 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와 같은 사람도 진실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99_2054.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99_2054.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799_2054.png" /><br style="clear:both;" />광주의 상황을 찍고 있는 위르겐 힌츠페터</p><p><br /></p><p><br /></p><p><br /></p><p>세월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고,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결실로 1997년 5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 법정 국가 기념일이 되었어요.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을 동원해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등 민주주의를 훼손한 혐의로 법정에 섰어요. 전두환은 무기 징역을, 노태우는 17년형을 선고받았지요.</p><p><br /></p><p>지금도 매년 5월 18일이 되면 유가족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는 기념식이 광주에서 열립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숭고한 죽음을 맞은 수많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면서요.</p><p>지금부터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민주화를 위해 계엄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던 광주 시민들의 심정을 느껴보세요. 또 5·18 민주화 운동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도 알아보아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880_1835.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880_1835.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880_1835.png" /><br style="clear:both;" /> </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50:33+09:00</dc:date>
</item>


<item>
<title>세계가 인정한 시민의 힘, 5·18 민주화 운동 유적</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509_8514.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509_8514.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509_8514.png" /><br style="clear:both;" />5·18 민주평화기념관(전남 광주시)</p><p><br /></p><p>“탕!탕!탕!”</p><p><br /></p><p>“전재수, 얼른 피해! 군인들이 총을 쏘나봐.”</p><p><br /></p><p>“알았어. 그런데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주신 신발이 벗겨졌어. 잠깐만!”</p><p><br /></p><p>“탕!탕!탕!”</p><p>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전재수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어요. 도대체 왜 어린 아이가 이런 비극적인 일을 겪은 것일까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지키는 군인들이 어째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 댄 것일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45:32+09:00</dc:date>
</item>


<item>
<title>남과 북이 다시 갈등 관계가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7</link>
<description><![CDATA[<p>2018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무르익었던 화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다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대화의 길이 막히면서 남과 북의 관계는 어려워졌지요.</p><p><br /></p><p>최근에는 군사적 행동과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며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과거 역사에서 그러했듯 남북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거예요.</p><p><br /></p><p>앞으로도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서 있을 거예요. 평화와 협력의 길을 모색하며, 통일을 향한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에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42:15+09:00</dc:date>
</item>


<item>
<title>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6</link>
<description><![CDATA[<p>문재인 정부(2017~2022) 시기인 2018년 평창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은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를 풀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어요.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입장하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178_3207.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178_3207.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178_3207.png" /><br style="clear:both;"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공동 입장하는 남북한 선수들</p><p>대한민국역사박물관</p><p><br /></p><p><br /></p><p><br /></p><p>당시 여자 아이스하키에서는 남북 선수들이 단일팀을 꾸려 경기에 나서기도 하였어요. 스포츠를 통해 평화와 화합을 보여준 특별한 순간이었답니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255_0998.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255_0998.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7255_0998.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뒤이어 같은 해 4월에는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했어요. 이 자리에서 발표된 「판문점 선언」에서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평화 체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 확대를 약속하였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41: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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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남북 정상 회담이 최초로 개최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5</link>
<description><![CDATA[<p>김대중 정부(1998~2003)는 북한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어요. 이를 ‘햇볕 정책’이라고 불렀지요. 이 정책은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개방과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을 의미해요.</p><p><br /></p><p>당시 북한이 큰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식량과 비료 같은 물자를 인도적으로 도와주었고, 금강산 관광과 같은 교류 사업도 시작하였어요.</p><p>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어요. 이는 남북이 서로 돕고 교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43_9392.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43_9392.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43_9392.png" /><br style="clear:both;" />소를 몰고 북으로 가는 정주영 회장</p><p>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0년 6월, 남북 정상 회담이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열렸어요.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92_9706.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92_9706.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992_9706.png" /><br style="clear:both;" />6·15 남북 공동 성명 장면</p><p>e영상역사관</p><p><br /></p><p><br /></p><p><br /></p><p>이 선언의 결과 이산가족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끊어졌던 철도와 도로를 다시 잇는 사업도 추진되었어요. 또 개성공단이 만들어져, 남한 기업이 북한에 공장을 세우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요.</p><p>2007년에는 노무현 정부(2003~2008)가 ‘평화 번영 정책’을 펼치며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열었어요. 이 자리에서는 서해에서 군사적 긴장을 줄이고 협력할 수 있는 특별 지대를 설치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어요. 이처럼 남북 정상 회담은 서로 신뢰를 쌓고, 평화와 협력을 향한 길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37:1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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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4</link>
<description><![CDATA[<p>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가 실시되는 등 정치적 민주화가 진척되었어요. 세계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했던 냉전 체제가 약화되었어요. 특히 동독과 서독이 독일로 통일이 되고, 공산주의 국가를 대표했던 소련이 해체되자 한반도 주변 정세도 급변하였어요.</p><p><br /></p><p>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는 중국·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는 북방 외교를 추진하였어요. 이처럼 국제 정세가 변화하자 북한도 외교적 고립을 피하려 남북 대화에 나섰어요.</p><p><br /></p><p>그 결과 1991년 9월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UN)에 가입하고, 같은 해 12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어요.</p><p><br /></p><p>「남북 기본 합의서」에는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교류·협력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어요. 이에 따라 남북간의 긴장 관계가 많이 완화되었어요.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같은 해 12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도 발표되어 핵 없는 한반도 건설을 약속하였지요. 이 시기의 성과는 냉전이 끝난 후 한반도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734_9848.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734_9848.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734_9848.png" /><br style="clear:both;"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후 유엔 본부 앞의 태극기와 인공기</p><p>국가기록원</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32:2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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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3</link>
<description><![CDATA[<p>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어요. 이어 9월 9일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어요. 냉전이라는 국제 질서로 인해 한반도는 남북이 분단이 되고 말았지요.</p><p>그리고 남북의 분단은 더 큰 아픔을 불러 왔어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유엔군(UN군)과 중국군까지 참전하면서 국제 전쟁으로 확대된 6·25 전쟁은 1953년 정전 협정으로 마무리되었어요. 남과 북은 휴전선을 경계로 분단이 더욱 공고해졌지요.</p><p><br /></p><p>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어요. 북한을 무력으로 공격해 통일을 이루고자 했어요. 4·19 혁명 이후 성립된 장면 정부는 새로운 통일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박정희 등 일부 군인 세력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어요.</p><p><br /></p><p>박정희 정부 초기의 남북 관계는 순조롭지 않았어요. 특히 1968년에는 청와대 습격 사건(1·21 사태),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매우 긴장되었어요. 그러나 1970년대 초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 간 긴장이 완화되면서 한반도에도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어요.</p><p><br /></p><p>이에 따라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렸어요. 여러 번의 회의 결과,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어요. 이를 통해 남과 북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합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지요.</p><p>당시 많은 국민들은 곧 통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어요. 그러나 국민들의 희망과 달리, 남한은 대통령의 권한을 절대화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유신 헌법을 발표하였어요. 북한도 김일성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어요.</p><p><br /></p><p>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통일 노력은 냉전 속에서도 남북이 직접 대화를 시도한 첫 사례로, 이후 여러 정부들이 추진하는 통일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601_3766.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601_3766.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601_3766.png" /><br style="clear:both;"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정부 관계자</p><p>e영상역사관</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30:15+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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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광복 직후 남북이 분단이 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2</link>
<description><![CDATA[<p>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어요. 거리는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과 만세 소리로 가득하였지요. 그러나 일본의 항복 선언 며칠 전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나누어 점령하기로 결정했어요. 결국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광복을 전후해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둘로 갈라지게 되었답니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410_4207.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410_4207.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410_4207.png" /><br style="clear:both;" /> </p><p><br /></p><p><br /></p><p>북위 38도선에 그어진 이 경계선은 본래 군사 작전을 위해 임시로 그어진 선이었지만,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점차 성격이 바뀌었어요. 냉전 체제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 팽팽하게 맞서던 국제 질서를 말해요.</p><p><br /></p><p>냉전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은 각기 다른 정치·경제 체제를 도입했어요.</p><p><br /></p><p>남쪽에서는 미군정이 행정 업무를 손쉽게 처리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기용하며 행정을 이어갔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 수립을 지원하였지요. 처음에는 왕래가 가능했지만, 양측 대립이 심화되면서 38도선은 점차 넘을 수 없는 분단으로 굳어져 갔답니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27:1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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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우리나라 정부의 통일 노력</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koreaunion/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211_6606.png" title="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211_6606.png" alt="874340c764b76c3ab4b2b29d047cfb42_1788366211_6606.png" /><br style="clear:both;" />파주 도라산역</p><p>경기도청</p><p><br /></p><p><br /></p><p><br /></p><p>“정말인가요? 남북이 분단되면서 끊어졌던 남북한 사이의 철도가 다시 이어진다고요?”</p><p><br /></p><p>“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의 결과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가 다시 이어진다고 하네. 이제 우리도 기차를 타고 북한을 갈 수 있게 되었다네. 정말 기쁜 일이야.”</p><p>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우리나라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어요. 그 결과 남과 북이 분단이 되어 남북한을 잇는 기차 운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지요. 더욱이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개성 간 기차 운행이 공식적으로 중단되면서 남북 철도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지요.</p><p><br /></p><p>한편 1948년 남한만으로 단독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국내외 정치 상황에 따라 정도와 방법이 다르긴 했지만, 남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어요. 특히 2006년 제1차 남북 정상 회담 때 발표된 6·15 남북 공동 성명 결과 남북한을 잇는 철도를 다시 복원하기로 했죠.</p><p><br /></p><p>그 결과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의 일부 구간이 개통이 되었고, 2007년부터 한국의 도라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한의 첫 번째 역인 판문역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러나 남북한 의 갈등이 깊어져 2008년 12월부터 현재까지 기차 운행이 중단된 상태랍니다. 다시 남북한의 평화 통일 노력이 이어져 경의선 철도가 예전처럼 운행하길 기대해 봅니다.</p><p><br /></p><p>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정부들은 평화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을까요?</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3T01:23:5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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