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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한국사, 코리아히스토리월드, 1555-0001 &amp;gt; 근대사 &amp;gt; 민족 실력 양성 운동</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민족 실력 양성 운동 (2026-09-02 13:51:0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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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간회, 독립을 위한 단결의 목소리를 내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7</link>
<description><![CDATA[<p>1927년 2월 15일 좌우 양쪽의 독립운동가들이 경성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 모였어요. 언론계 대표 신석우와 안재홍,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 천도교계 대표 권동진, 불교계 대표 한용운, 조선공산당 대표 한위건 등 28명을 발기인으로 정했어요. 그들은 신간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를 뽑았어요.</p><p><br /></p><p>신간회는 민족의 정치·경제적 각성, 민족의 공고한 단결, 일체의 기회주의 반대 등 강령 3개 항을 채택하고,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일제와의 타협 없는 대결을 분명히 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554_6722.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554_6722.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554_6722.png" /><br style="clear:both;" />이상재와 홍명희</p><p>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p><p><br /></p><p><br /></p><p><br /></p><p>신간회 창립 소식에 전국 각지에서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뜨거운 호응 아래 100개가 넘는 지회가 조직되고 회원 수도 4만 명에 달했어요.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으로서 손색없을 정도로 당대 최대 규모의 조직이 되었어요. 신간회 서울 본부는 주로 민족주의자들이 이끌어 가고, 지방 지회는 그 지방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활동을 벌여 나갔어요.</p><p><br /></p><p>신간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서는 활동을 펼쳐 나갔어요.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나 농민들의 소작 쟁의, 그리고 학생들의 식민지 교육 반대 운동에 힘을 보탰어요. 또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에게도 군자금을 모아 지원하였어요. 그밖에 우리 민족과 관련된 큰 사건이나 사회 운동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며 도움을 주었어요.</p><p><br /></p><p>또한 각 지회들은 야학이나 강연회, 연설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지식과 사상들을 전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일깨웠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654_2938.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654_2938.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654_2938.png" /><br style="clear:both;" />신간회 창립 대회 기사(동아일보 1927년 2월 17일)</p><p>“신간회 창립 대회, 200여 명의 회원이 출석하여 대회 창립하고 부서를 제정”이라는 제목 이래 신간회 창립 대회가 개최되었음을 알리고 있다.</p><p>동아일보</p><p><br /></p><p>1929년 11월 광주에서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반대와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어요. 이때 신간회는 부당하게 처벌받은 학생들을 돕기 위해 애썼어요. 그리고 광주 학생들의 시위를 전국적인 학생 저항 운동으로 확산시키려고 적극적으로 도왔어요. 이에 광주 학생 운동은 광주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했어요.</p><p>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회로 전국적 대규모 민중 대회를 열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일제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어요. 일제는 민중 대회가 열리기 전날 신간회 본부를 덮치고 지도자들을 잡아갔어요. 민중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신간회도 큰 타격을 입었어요. 게다가 신간회 내부에서 신간회를 없애자는 주장도 불거져 나오며 회원들 사이의 대립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어요.</p><p><br /></p><p>결국 신간회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5월 해체하고 말았어요. 모처럼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일제와 맞서 싸우던 신간회가 해산된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죠.</p><p><br /></p><p>그러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사상의 차이를 넘어 하나의 단체로 신간회를 조직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었어요.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생각이 달라도 얼마든지 힘을 합쳐 일제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p><p><br /></p><p>1920년대 일제 문화 통치 시기 우리 민족은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도 불구하고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의 실력 운동을 펼쳐 나갔어요. 그리고 자치 운동 세력에 맞서 사상의 차이를 뛰어넘은 민족운동 단체를 결성함으로써 단결된 민족운동을 보여주었어요.</p><p>만약 여러분이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민족 지도자라면 무엇을 하였을까요? 지금 공부한 것과 같은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을까요? 무엇이 당시 우리 민족을 위한 최고의 방법인지 친구들과 토론해 보세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51: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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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간회가 결성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6</link>
<description><![CDATA[<p>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어요. 한 갈래는 민족의 독립과 발전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어요. 다른 갈래는 사회주의 사상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세우려는 사회주의 세력이 있었지요.</p><p>그런데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자치권을 얻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것을 ‘자치 운동’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독립운동을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리하여 점차 일제의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친일파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에요.</p><p><br /></p><p>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유명한 소설가였던 이광수였어요. 그는 1922년에 우리 민족이 무능하여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민족 개조의 글’을 발표했어요. 한발 더 나아가 2년 뒤에는 『동아일보』 사설에서 ‘조선 총독부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를 해야 합니다.’라고까지 주장하였어요.</p><p><br /></p><p>유명 인사가 독립을 포기하고 자치부터 하자고 주장하자, 그 영향은 매우 컸어요. 이에 안재홍, 홍명희, 이상재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대응 방법을 의논했어요. 잘못하면 총독부를 등에 업은 자치 운동 세력이 커져 사람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어질 것을 우려했어요. 그렇다고 생각이 다른 사회주의 세력과 함부로 손을 잡기도 난처했지요.</p><p>민족주의자들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끝에 결단을 내렸어요. 생각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기로 말이죠. 그리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한데 뭉친 일제 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탄생하게 되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228_5635.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228_5635.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228_5635.png" /><br style="clear:both;" />신간회 창립대회 전경(중외일보 1927년 2월 17일)</p><p>1927년 2월 15일 19시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 신간회 창립대회 개최</p><p>중외일보</p><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44: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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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펼쳐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5</link>
<description><![CDATA[<p>1920년대 초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어요. 당시 일제는 한국인을 위한 교육은 되도록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으로 끝낸다는 교육 정책을 펴고 있었어요. 그래서 국내에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 전문학교 몇 개가 있을 뿐이었고, 대학은 없었지요. 이에 일제의 교육 차별에 저항하여 우리의 힘으로 한국인을 위한 대학을 세우자며 모금 운동이 펼쳐졌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747_0956.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747_0956.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747_0956.png" /><br style="clear:both;"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사진</p><p>독립기념관 제공</p><p><br /></p><p><br /></p><p><br /></p><p>1922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함께 뜻을 모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어요. ‘기성회’란 목적한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는 모임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민립대학기성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하였어요.</p><p>… 그러므로 오늘에 우리 조선인도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문화 민족의 일원으로 다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꾀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포기하고는 다시는 다른 방법이 없다. …</p><p><br /></p><p>-「민립대학기성회 발기 취지서」</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835_7214.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835_7214.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835_7214.png" /><br style="clear:both;"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인 총회 기사(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p><p>총회에서 이상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내용 등이 보도되고 있다.</p><p>동아일보</p><p><br /></p><p><br /></p><p><br /></p><p>민립 대학 기성회는 전국에 100여 개의 지부를 두고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어요. 대학 설립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웠지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일제의 교육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운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917_7484.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917_7484.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917_7484.png" /><br style="clear:both;"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선전 강연회 기사(동아일보 1923년 4월 20일)</p><p>한용운이 강연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p><p>동아일보</p><p><br /></p><p><br /></p><p><br /></p><p>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당황했어요. 일제는 총독부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것은 불온한 사상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어요. 아쉽게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일제의 계속된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어요.</p><p><br /></p><p>그러나 일제는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에 비추어 언제까지나 대학 설립을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통제가 가능한 관립 대학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p><p><br /></p><p>결국 1924년 관립 대학인 경성 제국 대학이 문을 열었어요. 일제는 경성 제국 대학이 일본의 도쿄 제국 대학 등과 같은 급의 대학이라고 선전하였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075_9456.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075_9456.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4075_9456.png" /><br style="clear:both;" />경성제국대학병원 사진엽서</p><p>경성 제국 대학은 1924년 대학교 예비교육 과정인 2년제 예과로 출발하였다.</p><p>서울역사박물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41:3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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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4</link>
<description><![CDATA[<p>1920년대 들어서 일제는 회사령을 폐지하였어요. 회사령은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회사를 세울 수 없도록 한 제도에요. 회사령 폐지로 우리 기업들은 다소나마 숨통이 트였어요. 그러나 곧 우리 기업들은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일본 기업들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하는 무척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어요.</p><p><br /></p><p>당시 일본 상품은 총독부의 지원으로 값도 싸고 품질도 좋았어요. 그렇다 보니 우리 기업의 상품은 경쟁에서 밀렸지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초 조만식의 주도로 평양에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당시 평양에는 경성 방직 회사, 메리야스 공장과 같은 민족 자본에 의해 세워진 우리 기업들이 많았어요.</p><p><br /></p><p>물산 장려 운동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생산한 물건을 사서 사용하자고 권하고 격려하는 운동이에요.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의 구호를 내세웠어요. 좀 비싸더라도 우리 기업이 만든 물건을 사서 쓰면 우리 민족 기업이 발전하고, 그게 바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이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242_178.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242_178.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242_178.png" /><br style="clear:both;" />경성방직 생산 광목 광고(동아일보 1923년 8월 13일)</p><p>‘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쓰자는 등의 문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p><p>동아일보</p><p><br /></p><p><br /></p><p><br /></p><p>물산 장려 운동은 곧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1923년 1월 서울에서 전국 규모의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되었지요.</p><p>… 우리 조선 사람의 물건을 장려하기 위해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서 쓰고,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우리가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각오와 노력이 없이 어떻게 조선 사람이 그 생활을 유지하고 그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p><p><br /></p><p><br /></p><p><br /></p><p>-「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46_1753.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46_1753.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46_1753.png" /><br style="clear:both;" />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p><p>“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서 쓰자”는 내용의 물산 장려 운동의 취지를 담고 있다.</p><p>독립기념관 제공</p><p><br /></p><p><br /></p><p><br /></p><p>조선물산장려회는 다음과 같은 실천 사항을 정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어요. 첫째,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입고 여자는 검정 물감을 물들인 무명 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 소금 등을 제외한 식료품은 우리 땅에서 생산된 것만 먹는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사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 생산품을 사용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절약을 한다.</p><p><br /></p><p>조선물산장려회는 서울과 평양 이외에 다른 지역에도 많은 지회를 조직하고, 국산품 애용을 주제로 한 강연회나 시위 등을 활발히 벌여 나갔어요. 이때 학생들은 조선 물산을 장려하여 자급자족 정신을 기를 목적으로 자작회를 만들어 동참하였어요. 또 부녀자들은 토산 애용 부인회를 만들어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88_8491.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88_8491.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488_8491.png" /><br style="clear:both;" />조선물산장려회의 회보</p><p>독립기념관 제공</p><p><br /></p><p><br /></p><p><br /></p><p>그런데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한 일부 기업가들은 우리 기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주는 보조금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어요. 순수한 애국심으로 우리 기업의 상품을 사 쓴 소비자들은 배신감을 느꼈지요.</p><p><br /></p><p>게다가 물산 장려 운동으로 고무신같이 많이 팔린 일부 물건은 값이 올라 서민들은 그나마 사 쓰지도 못하는 일이 생겼어요. 이 운동으로 이득을 보는 건 먹고살 만한 부자와 상인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힘들어져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요.</p><p><br /></p><p>그리하여 물산 장려 운동에 호응하는 사람들 수도 점차 줄어들었어요. 그 결과 아쉽게도 이 운동은 이내 시들고 말았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530_0346.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530_0346.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3530_0346.png" /><br style="clear:both;" /> </p><p>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시가지 행진</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32:1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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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신문과 잡지가 발행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3</link>
<description><![CDATA[<p>문화 통치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가 많이 생겨났다는 점이에요. 일제는 정책을 바꾸어 우리 민족이 만든 신문과 잡지 발행을 허가해 한국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고, 대신 그 내용을 철저히 감시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때 발행 허가를 받은 대표적 신문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였어요.</p><p><br /></p><p>이들 신문은 식민 통치를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어요.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매일 수만 부 이상 발행하는 인기 신문이 되었지요.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신문을 압수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어요. 일제가 겉으로는 언론 자유의 보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을 철저히 감시하였어요.</p><p><br /></p><p>한편 1920년대에는 신문 말고도 『별건곤』, 『삼천리』 같은 여러 잡지가 등장하여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어요. 특히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 잡지인 『개벽』은 천도교에 대한 글 이외에도 식민 통치에 비판적인 글이 많아서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어요.</p><p>이러한 때에 애국지사들 가운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우선 우리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나라의 독립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어요. 그리하여 먼저 우리 스스로 경제를 부강하게 하고, 사회·문화를 더 발전하기 위한 민족운동을 펼쳤어요. 이를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이라고 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2879_2305.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2879_2305.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2879_2305.png" /><br style="clear:both;" />동아일보 창간호(1920년 4월 1일)와 개벽 창간호 표지(1920년 6월 25일)</p><p>동아일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21:4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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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식민 통치 방법이 달라지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2</link>
<description><![CDATA[<p>3·1운동은 일제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어요. 우리 민족의 엄청난 힘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생각했어요.</p><p><br /></p><p>“조선을 통치하는 방법을 바꿔야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일단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풀어주는 척해야겠다.”</p><p><br /></p><p>일제는 그동안 힘으로 밀어붙이던 무단 통치를 그만두었어요. 대신 식민 통치 방법을 바꿔 우리 민족에게 조금이나마 자유를 주는 ‘문화 통치’를 실시하였어요.</p><p><br /></p><p>우선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폐지하였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보통 경찰 제도로 바꾸면서 오히려 경찰의 수를 크게 늘렸지요. 또한 일제는 현역 군인만 임명하던 조선 총독 자리에 민간인 관리도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을 고쳤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 통치가 끝날 때까지 민간인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어요.</p><p><br /></p><p>한편 일제는 식민 통치에 협력할 한국인 수를 늘리기 위해 애썼어요.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는 귀족, 양반, 부자, 사업가, 교육자, 종교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친일파로 만들고 각종 친일 단체를 만들라고 지시했어요.</p><p>결국 일제가 표방한 문화 통치는 허울뿐인 포장된 말이었고 실상은 한국인을 분열시키려는 기만적인 정책이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08:18+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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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조선,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펼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minjokmovement/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9/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1982_0117.png" title="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1982_0117.png" alt="ffee8fb6eaf8983e7b39e961758b7e7a_1788321982_0117.png" /><br style="clear:both;" />물산장려운동 포스터</p><p>동아일보</p><p><br /></p><p><br /></p><p><br /></p><p>“지금 독립은 당분간 힘드니, 우리 조선인은 마땅히 종교·산업과 같은 문화적 사업에 열중하여 실력 양성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p><p><br /></p><p>1920년대 일부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은 잠시 멈추고 우선 경제·사회·문화 분야에 온 힘을 집중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운동을 펼쳤어요. 그들의 생각은 옳았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9-02T13:06:4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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