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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의 역사, 한국사, 코리아히스토리월드, 1555-0001 &amp;gt; 근대사 &amp;gt; 박은식</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박은식 (2026-08-31 14:13:0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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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10</link>
<description><![CDATA[<p>박은식은 죽는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했어요. 그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다음과 같이 동포들에게 드리는 당부의 글을 남겼어요.</p><p><br /></p><p>“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온 민족이 단결해서 해야 할 것이오.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의 운동으로 삼고 독립운동을 위하여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써야 할 것이오. 셋째, 독립운동은 우리 모두에 관한 일이니, 동지 간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오.”</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14_8455.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14_8455.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14_8455.png" /><br style="clear:both;" />1925년 독립신문에 실린 박은식 유촉 기사</p><p>대한민국역사박물관</p><p><br /></p><p><br /></p><p><br /></p><p>박은식은 독립운동의 열망과 민족의 단합을 당부하며 1925년 67살의 나이로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거행하였어요. 중국 상하이에 모신 박은식의 유해는 1993년 8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지요.</p><p><br /></p><p>박은식은 언론 활동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친 선각자였어요. 또한 어려움에 빠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려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어요. 특히 그는 역사 연구와 집필을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삼고 우리의 혼을 지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어요.</p><p><br /></p><p>여러분이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박은식의 독립운동을 통해 무엇을 배웠나요? 박은식이 살았던 시대에도 역사가 중요하였듯이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에도 역사가 중요해요. 우리도 박은식 선생님의 뜻을 이어 후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65_3122.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65_3122.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3165_3122.png" /><br style="clear:both;" />박은식의 서거와 장례식 내용이 담긴 독립신문호외</p><p>독립기념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4:13:0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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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통사를 저술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9</link>
<description><![CDATA[<p>박은식은 중국 상하이에 있으면서 안중근 의사를 다룬 『안의사중근전』을 저술하였어요. 그리고 그동안 꾸준히 집필해 왔던 『한국통사』를 드디어 완성하였어요. 이때가 1915년이었지요.</p><p><br /></p><p>『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에요. 1864년 흥선대원군 섭정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사를 일제 침략사와 민족 운동사 등으로 구분하여 다루었어요.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폭로 규탄하는 한편, 민족적 분노를 드러내 동포들의 반성과 깨달음을 요구하였어요. 그는 『한국통사』를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어요.</p><p>“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07_8899.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07_8899.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07_8899.png" /><br style="clear:both;" />한국통사</p><p>독립기념관</p><p><br /></p><p><br /></p><p><br /></p><p>박은식은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원동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의 바람대로 『한국통사』는 간행하자마자 중국‧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한국통사』를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교과서로도 사용하였어요. 또 비밀리에 배포되어 식민 통치 아래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북돋아 주었어요. 그렇게 사람들은 『한국통사』를 읽고 공부하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독립 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졌지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38_5602.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38_5602.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838_5602.png" /><br style="clear:both;" />역사책을 저술하는 박은식</p><p><br /></p><p><br /></p><p><br /></p><p>또한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에 대해 많은 사료와 통계 자료를 수집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완성하였지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1920년의 독립투쟁사를 3․1 운동을 중심으로 담은 책이었어요.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고발하는 한편, 3‧1 운동이 민족 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봉기임을 밝혔지요. 그리고 다음과 같이 독립운동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였어요.</p><p><br /></p><p>“백번 꺾어도 꺾이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리를 갖게 될 것”</p><p><br /></p><p>『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민족의식과 독립 투쟁에 대한 뜻을 더욱 굳게 가지도록 하였고, 민족 독립운동의 원전이 되었어요.</p><p><br /></p><p>박은식은 나라의 독립을 기다리며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맥을 잇는 『광복사』를 쓰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931_4449.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931_4449.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931_4449.png" /><br style="clear:both;" />한국독립운동지혈사</p><p>독립기념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4:09: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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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8</link>
<description><![CDATA[<p>1921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과 생각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혁을 둘러싸고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으나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어요. 이 무렵 박은식은 상하이 임시 정부 기관 신문인 『독립신문』 주필로, 그리고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p><p><br /></p><p>독립운동가들은 임시 정부의 정상화와 민족 세력의 분열을 막고자 방법을 모색하였어요. 이에 박은식을 모셔 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였지요. 그리고 1925년 마침내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어요.</p><p>박은식은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통치 체제를 바꾸기로 하였어요. 그는 임시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한 사람이 많은 권한을 갖는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내각 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꾸었어요. 바뀐 새로운 헌법에 따라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뽑고 박은식은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어요. 민족의 역량을 모으고 화합을 위한 박은식의 결단이었지요.</p><p><br /></p><p>“나는 임시 정부의 심부름꾼이면 족한 사람이야. 애국은 조용히 실천하고 남모르게 하는 거야.”</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4:02:2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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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국 상하이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 투쟁을 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7</link>
<description><![CDATA[<p>1912년 박은식은 북경을 거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만주와 시베리아 여러 곳을 돌아 상하이로 갔어요. 그는 그곳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비밀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하였어요. 동제사는 중국 관내(關內)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였어요.</p><p>동제사는 앞으로 펼쳐 나갈 독립투쟁을 위해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어요. 또 박달학원을 세워 역사관을 바로 세우게 한 뒤 상급학교나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 인재를 길렀어요. 박은식은 신채호 등과 함께 이들을 교육하는 강사로 활동하였어요.</p><p><br /></p><p>또한 박은식은 이상설 등이 조직한 신한혁명당에 참여하여 취지서 등을 만들고 감독으로 활동하였어요. 그리고 1917년 신규식‧조소앙‧신채호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어요. 이 선언에서 그들은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하였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4:01: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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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라의 혼을 지키려 역사책을 쓰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6</link>
<description><![CDATA[<p>1910년 결국 나라를 빼앗겼어요. 이제 한국인의 모든 언론 기관은 폐쇄당하였고 우리 민족의 혼이 들어 있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빼앗기고 불태워졌어요. 박은식은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하였어요.</p><p><br /></p><p>“국체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p><p>이에 박은식은 깨달았어요. 그리고 굳게 다짐했지요. 자신의 사명은 후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쳐 나라의 혼을 지켜내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이지요.</p><p><br /></p><p>“우리 조상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다른 민족에 동화된다.”</p><p><br /></p><p>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박은식은 만주로 망명하였어요. 그리고 역사책을 쓰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계속해 이어 나갔어요.</p><p><br /></p><p>그리고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사서를 탐독하고 연구하였어요. 그 결과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천개소문(연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등의 우리 민족 고대 역사책을 저술하였어요.</p><p><br /></p><p>이 책들은 모두 민족의 영웅호걸들을 다루고 있어요. 우리 민족이 모두 이들과 같은 영웅호걸이 된다면 나라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바람이 담겨 있었어요. 그리고 그가 유독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밝히고 우리 역사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380_3522.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380_3522.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380_3522.png" /><br style="clear:both;" />발해태조건국지</p><p>국가유산청</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4:00:07+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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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교육 구국 운동을 펼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5</link>
<description><![CDATA[<p>박은식은 잡지를 통해서도 대중 계몽 운동에 힘썼어요. 1906년 4월에 조직된 대한자강회에 참여하여, 기관 신문인 『대한자강회월보』에 논설을 썼어요. 특히 논설을 통해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을 깨우치고자 하였어요.</p><p><br /></p><p>“나라는 우리의 큰 가족이다. 만약 그 가족의 정신이 완전하지 않으면 다른 가족의 압제와 유린을 당한다. 그러니 국민의 교육을 발달시켜 실력을 키우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p><p><br /></p><p>또 1906년 관서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우학회를 조직하고 기관 신문인 『서우』의 발행을 맡았어요. 『서우』에서는 교육의 진흥을 위해 사범학교와 의무 교육의 시급함을 역설하였어요.</p><p><br /></p><p>“교육 방침에 대해 최우선 급선무는 사범학교의 양성이다. 대개 학생은 국가의 기초이고 어린아이들의 공부는 학생의 기초이다. 이들이 없으면 어찌 온전한 국가가 있으리오?”</p><p><br /></p><p>1908년 서북인 중심의 서우학회와 관북인 중심의 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서북학회가 창립되었어요. 박은식은 초대 회장직을 맡으면서 서북학회의 회지인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도 활동하였어요.</p><p>박은식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며 과학 기술을 연구하여 실질적인 문물을 만들어 내는 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어요. 지금 나라를 살릴 사람들은 학문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지요.</p><p><br /></p><p>“누가 우리나라를 구할 자이며, 누가 우리 민중을 살릴 자인가. 실업학가(實業學家)가 이들이다.”</p><p><br /></p><p>박은식은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 결과 서울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설립되었지요. 박은식은 이 두 학교의 교장을 맡아 신교육과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에 63개의 학교를 설립했어요.</p><p><br /></p><p>한편 일본은 한국의 유교 단체를 자기들 편으로 만들려 하였어요. 이에 맞서 1909년 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립하였어요. 그리고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의 발표를 통해 유교계의 개혁을 촉구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어요.</p><p><br /></p><p>이와 같이 박은식은 이 시기에 민족의 역량을 모으고 기르는 데 온 힘을 쏟았기 때문에,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애국 계몽운동가라 할 수 있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230_692.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230_692.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2230_692.png" /><br style="clear:both;" />서북학회월보</p><p>독립기념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3:57:21+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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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언론을 통한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4</link>
<description><![CDATA[<p>언론을 통한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치다1905년 일본은 대한 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어요. 그 결과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박은식은 나라의 힘을 키우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우쳐 주는 것이 필요했어요.</p><p><br /></p><p>이에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애국 계몽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어요. 일제의 탄압으로 『황성신문』 발행이 중지되자,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로 활동하였어요.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어서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어요. 이런 이유로 박은식 등의 애국지사들은 거침없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이에 맞설 것을 주장할 수 있었어요.</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930_8484.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930_8484.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930_8484.png" /><br style="clear:both;" />대한매일신보에서 활약한 박은식</p><p><br /></p><p><br /></p><p><br /></p><p>『황성신문』이 다시 발행되자, 박은식은 신문의 주필로 다시 활약하였어요. 지금 일본의 침략을 맞아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이 분발하여 근대적 실력을 기르고 국권 회복의 장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을 주장하였지요.</p><p><br /></p><p>이처럼 박은식은 신문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북돋웠어요. 그의 언론 투쟁은 신문이 일본에 강제로 폐간될 때까지 계속되었어요.</p><p><br /></p><p>“나의 유일한 무기는 펜이다.”</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3:55:14+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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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3</link>
<description><![CDATA[<p>박은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었어요. 동시에 점차 신학문과 신지식에 관심을 기울이며 나라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였어요. 박은식은 독립협회에서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간부급 지도자로 활동하였어요. 그리고 열강의 이권 쟁탈을 규탄하고 러시아와 일본 세력의 철수를 요구하였지요.</p><p><br /></p><p>또한 1898년 남궁억 등이 『황성신문』을 발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이 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국권 회복과 실력 배양을 위해 많은 논설을 썼어요. 우리가 나라를 지키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p><p><br /></p><p>*주필: 신문사나 잡지사 따위에서 행정이나 편집을 책임지는 사람</p><p><br /></p><p><br /></p><p><br /></p><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790_9892.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790_9892.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790_9892.png" /><br style="clear:both;" />황성신문</p><p>독립기념관</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3:50:32+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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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두루 공부하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2</link>
<description><![CDATA[<p>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과거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세상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두루 공부했어요. 글공부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불렸다고 해요.</p><p><br /></p><p>박은식은 30살이 넘도록 학문을 익히는데 힘썼어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정약용의 제자를 찾아가 공부하며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 현실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또 평안북도 태천에 사는 대학자 박문일을 찾아가 배우며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 자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어느 날 박은식은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였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p><p><br /></p><p>“나라가 힘이 없으면 저 꼴을 당한다.”</p><p><br /></p><p>1885년 박은식은 과거에 합격하였어요. 하지만 한참 지난 30살에 평양 숭인전 참봉 그리고 34살에 동명왕릉(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능)의 책임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이것이 관직 생활 전부였어요. 그렇지만 평양에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져 서북 지방은 물론 서울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어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3:47: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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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박은식, 역사가 살아야 나라를 되찾는다</title>
<link>http://www.koreahistory.world/parkeunsik/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www.koreahistory.world/data/editor/2608/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461_2001.png" title="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461_2001.png" alt="03197433185a79076351cb85e1a86cf8_1788151461_2001.png" /><br style="clear:both;" />박은식 동상</p><p>청주시청</p><p><br /></p><p><br /></p><p><br /></p><p>“나라의 혼은 곧 역사이기 때문에 나라의 혼이 살아 있는 역사책을 저술하는 것이 곧 독립을 위한 중요한 일이다.”</p><p><br /></p><p>1910년 우리나라는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어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어요. 그들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강조하고 지키려 했던 분이 있었어요. 누구일까요? 그는 왜 역사 연구를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을까요?</p>]]></description>
<dc:creator>지금</dc:creator>
<dc:date>2026-08-31T13:44:40+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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