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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민족의 실력을 키우고자 애쓰다
명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교육만이 희망이다
미국 교포 사회를 이끌다
오렌지 한 개에 나라 사랑을 담다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애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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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민족의 실력을 키우고자 애쓰다
도산공원(서울 강남구)“어디들 가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오늘 쾌재정에서 만민 공동회가 열린답니다. 나라의 높은 관리들도 오고 특별한 청년 연사가 나와 연설도 한다고 합니다.”만민 공동회는 우리나라 이권을 빼앗으려는 외세에 맞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려는 민중 대회였어요. 평양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대동강 서쪽 언덕의 쾌재정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의 특별한 청년 연사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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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09-01
8
명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1897년 쾌재정 만민 공동회의 특별한 연사로 나선 사람은 19세의 청년 안창호였어요. 그가 처음 대중 앞에 서는 순간이었어요.“여러분, 쾌재정에서 이렇게 뵈니 쾌재(통쾌하다)가 절로 나옵니다. 고종 황제 폐하의 탄생일인 오늘같이 뜻깊은 날에 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단상에 오른 안창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시원하게 입을 열었어요. 안창호의 연설은 시작부터 대중들을 사로잡았지요.“그러나 요즘 우리에게 쾌재를 부를 일이 별로 없습니다. 백성을 보살피고 도와야 할 관리들이 오히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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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09-01
7
교육만이 희망이다
어릴 적 평양에서 자란 안창호는 청과 일본이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어요. 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집과 공장들이 불타고 사람들은 피난을 가야만 했어요. 싸우는 쪽은 청과 일본이었지만 정작 피해를 보는 쪽은 조선의 백성들이었어요. 안창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자기들 나라에서 싸울 것이지, 왜 남의 나라 땅에서 싸울까?”“그래, 우리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 있는 민족이 되면, 어떤 나라도 우리 땅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안창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깨달았어요. 이때부터 그는 나라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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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9-01
6
미국 교포 사회를 이끌다
1902년 안창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섰어요. 조국을 위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그는 넓고 넓은 바다에 우뚝 솟은, 웅장한 하와이섬을 보고 감격하였어요. 이때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 지었어요.“나도 넓고 넓은 저 바다에 우뚝 서 있는 섬(도산)과 같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리라.”안창호는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어요. 그는 초등학교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하였어요. 25세의 늦은 나이지만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을 부끄러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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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09-01
5
오렌지 한 개에 나라 사랑을 담다
1903년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만들어 교포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살 수 있도록 힘썼어요. 그해 안창호는 일자리를 찾는 교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의 리버사이드로 이사를 하였어요. 그는 이곳 농장에서 일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었어요. 또 그럴 때마다 교포들을 이렇게 격려해 주었지요.“여러분, 오렌지 한 개를 따도 정성껏 따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남의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정성을 기울여 일합시다.”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안창호독립기념관1905년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이끌어 온 동지들과 함께 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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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9-01
4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애쓰다
이 무렵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 왔어요. 공립협회는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을사늑약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배포하였어요.안창호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요. 이제 더는 조국의 현실을 두고만 본 채 미국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안창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애국심을 북돋는 연설을 했어요. 일본 경찰이 그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했지만, 안창호는 아랑곳없이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 외쳤어요.“여러분,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를 사랑하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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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9-01
3
국외 한인들의 힘을 한데 모으다
1909년 안창호는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풀려났어요. 더는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안창호는 훗날을 기약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향하였어요.1912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미국 본토,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 각 지역 대표자를 모이게 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였어요. 국외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생활을 개선할 목적이었지요. 그는 초대 총회장에 뽑혀 여러 나라에 사는 한인 사회를 조직적으로 이끌며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갔어요.“조국이 일제에 짓밟혔지만, 우리라도 국외에서 인정받는 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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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9-01
2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다
1919년 안창호는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들었어요. 그는 대한인국민회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어요. 그리고 벅찬 감격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쳤지요.“장하다, 내 겨레! 훌륭하다, 내 민족! 이제 온 민족이 일제히 일어나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바칠 각오로 대한 독립을 힘껏 외칩시다!”고국을 떠나온 1세대 한인 이민자들은 낯선 땅에서 차별과 나라 잃은 슬픔을 겪었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뿐이었지요.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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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09-01
1
자나 깨나 독립을 꿈꾸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어요. 이 일로 일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갔어요. 안창호도 일본 경찰에 붙잡혔어요.“앞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석방해 주겠소.”“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잤소. 나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오.”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모습(1937년)국사편찬위원회일제는 갖은 방법으로 안창호의 독립운동 의지를 꺾고자 했지만 그의 뜻은 변함없이 단호했어요. 어둡고 좁은 독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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