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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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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김홍집, 개화 정부를 이끌다
개화사상을 배우다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다
외교무대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조선책략』을 들여오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다
을미개혁을 추진하다
김홍집과 개화파가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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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개화 정부를 이끌다
군국기무소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지금 시무(時務)가 매우 급하고 사람들의 기대도 더욱 간절하니, 경은 즉시 명을 받고 개혁을 담당하여 처리하도록 하라.”“힘들고 어려운 때에 신이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신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루겠나이다.”1876년 개항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김홍집은 개화만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김홍집이 선택한 개혁은 성공하였을까요? 그의 활동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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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08-31
7
개화사상을 배우다
김홍집은 1842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는 성장하면서는 고전 한학을 두루 익히면서도 실학에도 관심을 갖고 여러 사람과 사귀었어요. 실학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한 새로운 경향의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에요.25살이 되던 1867년 김홍집은 성균관에 유생으로 들어가 바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일하였어요. 김홍집은 이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김영작으로부터 학문과 공직자의 태도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김영작은 당대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개화파의 선구자인 박규수와 친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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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8-31
6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다
1876년 정신적 지주인 박규수가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은 개화 세력은 두 파로 갈라졌어요. 한 파는 조선 사회가 중국의 자강운동(양무운동)을 모델로 하여 점진적으로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온건 개화파였고, 다른 한 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개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사회 개혁을 하루빨리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였어요.온건 개화파에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김기수·박정양 등이 있었어요. 이들 대부분은 개항 이후 나라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던 집권 세력에 속해 있었어요. 이들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조선이 시급하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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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8-31
5
외교무대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1880년 김홍집은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수행원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어요. 일본에 개항하면서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쌀이 무관세로 일본에 유출되며 쌀값이 폭등하고 식량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지요.조선 정부는 불리하게 맺어진 강화도 조약의 개정을 의논하고, 일본의 국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한 것이었어요.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홍집 일행은 일본 측에 조선의 입장을 문서로 전달하였어요. 그러나 일본 측은 조선의 요구를 회피하는 작전으로 일관하였어요.김홍집은 일본과의 논의가 여의치 않자, 일본에 와 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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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8-31
4
『조선책략』을 들여오다
조선에 돌아온 김홍집은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국왕에 바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남하가 중국 및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우려하는 것이라는 것과 조선이 스스로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외교를 강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보고하였어요.고종은 김홍집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통리기무아문(대외 정책 및 군사를 비롯한 일반 관청업무 총괄)을 설치하고 그 통상 당상(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직)에 임명하였어요.김홍집이 소개한 『조선책략』은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어요. 그리고 조선에는 개화 바람이 급물살을 타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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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08-31
3
갑오개혁을 추진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어요. 동학농민운동이 진정되지 않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어요. 이를 빌미 삼아 일본도 덩달아 조선에 군대를 출동시켰지요. 일본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어요.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고종은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어요. 개혁을 담당할 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김홍집은 군국기무처 회의 총재가 되어 개혁(갑오개혁)을 시작하였어요.대신들을 임명하는 칙령독립기념관 제공갑오개혁으로 관직제도가 개편되면서 김홍집은 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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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8-31
2
을미개혁을 추진하다
1895년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어요. 일본의 포학무도함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높아져 갔고, 서구 열강들의 비난도 거세졌지요.국내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더욱 힘을 쏟았어요. 이때가 1895년 을미년이었기 때문에 이를 ‘을미개혁’이라고 해요.김홍집 내각은 교육이 개화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어요. 이어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근대적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지요. 그리하여 우선 경성 안에 근대적 소학교를 세워 아동을 교육하는 데 힘쓰도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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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08-31
1
김홍집과 개화파가 무너지다
1896년 2월, 김홍집 내각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를 파견한 틈을 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어요(아관파천, 俄館播遷).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졌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강해졌으며 김홍집 내각도 무너지고 말았어요.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개화파 대신들을 해임하고는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김홍집은 성난 백성들에게 그만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어요. 김홍집의 죽음으로 조선의 정치권에서 개화파는 사실상 몰락했고 이들이 주도한 개혁도 멈췄어요.한편 김홍집은 순종에 의해 새롭게 평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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