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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삼전도비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광해군과 인조의 서로 다른 외교정책
한양 도성의 방어를 위해 지었던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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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삼전도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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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남한산성 남문(경기 광주시)문화재청“나라님이 피난을 가셨다는군!”“어디로 가셨단 말인가?”“남한산성으로 가셨다네. 그나저나 우리 백성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소현세자, 그리고 신하들까지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을 갔어요. 이들이 피난을 갔던 남한산성은 어떤 성이었을까요? 그곳에는 어떤 특별한 시설들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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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30
6
광해군과 인조의 서로 다른 외교정책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시기 중국 대륙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명나라가 힘을 잃어가고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명과 후금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어요. 이때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요.광해군은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명을 도와 군사를 보내자니 후금의 공격을 받을 것 같았어요. 반면,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나라에게 거센 외교적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자칫 잘못 판단하면 조선의 앞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광해군은 일단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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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8-30
5
한양 도성의 방어를 위해 지었던 남한산성
조선은 한양 도성 방어를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쌓았어요. 남한산성은 해발 500m 가량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쌓은 성이에요.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평평한데, 성 밖은 가파르고 험해 적들이 쉽게 공격하기 힘든 곳이지요.남한산성은 1624년 인조 때 지어졌어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을 방어하는 성을 쌓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졌지요. 하지만 실행되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후금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남한산성을 쌓기 시작했어요.그런데 남한산성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어요. 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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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08-30
4
47일간 인조가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 간 인조는 어디에 머물렀을까요? 바로 행궁이랍니다. 행궁은 왕이 지내던 궁 밖으로 나가게 될 때 임시로 머물던 궁을 말해요.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의 행궁 중 규모가 가장 컸어요. 나라에 전쟁이나 내란 같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왕이 머물면서 나랏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종묘의 위패를 보관하던 좌전과 사직의 역할을 하는 우실도 갖추었어요.인조는 행궁에 47일간 머물며 청과 맞섰어요. 평소에 전쟁을 대비해 무기와 식량을 준비해 둔 남한산성이기에 짧은 기간은 버틸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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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8-30
3
가장 높은 곳에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었던 수어장대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어요. 장대는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었지요. 장수들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주변 상황을 관찰하기가 유리했거든요.남한산성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수어장대예요. 원래는 서쪽에 있어 서장대라고 불렸지요. 이곳에서는 맑은 날엔 멀리 인천까지도 보인다고 해요.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직접 수어장대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며 청에 맞섰다고 해요.원래는 1층이었던 것을 병자호란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영조 때 2층으로 올려 지었어요. 2층 바깥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무망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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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08-30
2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은 점점 더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며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압박했어요. 사실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었어요.청 태종은 조선의 임금이 신하의 예를 갖추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어요. 이때 김상헌 등은 청군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반면 최명길 등은 현실을 받아들여 청의 요구대로 화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결국 인조는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어요. 인조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청의 군대가 있는 한강 삼전도(삼전나루,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지역)로 나갔어요. 그리고 높이 쌓은 단 위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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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08-30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끝까지 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던 삼학사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황제에게 항복하려고 하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윤집, 오달제, 홍익한이지요. 이들을 가리켜 ‘삼학사’라고 불러요.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 청나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임금과 신하의 관계’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왔지요. 이에 대해 삼학사는 청의 사신을 죽여 청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은 눈에 가시 같던 삼학사를 인질로 끌고 갔어요. 청의 수도인 심양까지 끌려간 그들은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요. 청의 장수 용골대는 삼학사에게 가족과 함께 청에 살 것을 제안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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