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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전하던 봉수
조선 세종 때 자리 잡은 봉수 제도
봉수대의 횃불의 개수가 달랐던 이유
각 지역에 연결된 5개의 봉수로
목멱산의 다섯 곳에 있었던 봉수대
해안선을 따라 설치되었던 연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봉수군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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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전하던 봉수
목멱산 봉수대(복원), 서울 남산“외적이 국경선을 넘었다. 어서 봉화를 올려라.”“네. 즉시 봉홧불을 피우겠습니다.”봉수는 전쟁이나 외적의 침입 등 다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 수단이지요. 각 지역의 봉수대를 통해 전해진 소식을 받아 한양 목멱산(남산)에서 마지막 봉수를 올려 조정에 소식을 전했어요.그렇다면 언제부터 봉수를 이용해 소식을 전했을까요? 또 어떤 방법으로 서로 다른 상황을 알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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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08-28
6
조선 세종 때 자리 잡은 봉수 제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어떻게 소식을 전했을까요? 사람이 직접 가거나, 산봉우리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소식을 알렸어요. 적이 쳐들어오는 등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빨리 소식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거든요. 그래서 이런 소식들을 쉽고 빨리 전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어요. 바로 봉수 제도와 파발 제도에요.봉수는 횃불(烽, 봉)과 연기(燧, 수)를 피워 소식을 알리는 것이고, 파발은 사람이 말을 타고 가거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말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봉수를 이용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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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08-28
5
봉수대의 횃불의 개수가 달랐던 이유
봉수 제도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피워 긴급한 상황을 알리던 제도이지요. 구름이 끼거나 안개가 자욱할 때는 횃불이나 연기는 멀리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병사가 다음 봉수대까지 뛰어가서 소식을 전했어요.상황에 따라 봉수의 개수는 달랐어요.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상태일 때는 1개의 봉수를 피웠어요. 적이 국경 지대에 나타나면 2개의 봉수를 피웠어요.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적이 국경을 넘으면 4개, 국경을 넘어온 적과 우리 병사들 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5개의 봉수를 피웠지요. 병조에서는 항상 목멱산의 봉수를 관찰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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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08-28
4
각 지역에 연결된 5개의 봉수로
조선 시대 봉수는 5개의 길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제1 봉수는 북쪽 국경 지대인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해서 강원도를 거쳐 한양의 아차산으로 전해졌어요. 제2 봉수는 남쪽 끝인 경상도에서 경기도 광주 천림산으로 전해졌어요. 제3 봉수는 서북쪽 끝인 평안도에서 한양 무악산으로 전달되었어요. 제4 봉수는 서쪽 해안에서 한양 무악산 서쪽으로, 제5 봉수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시작된 봉수가 서울 양천의 개화산으로 전달되었어요.이렇게 모든 봉수는 마지막에 목멱산으로 전달되었지요. 그럼 정보가 출발지에서 마지막 봉수대인 목멱산까지 도착하는 데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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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08-28
3
목멱산의 다섯 곳에 있었던 봉수대
목멱산은 조선 시대 도읍인 한양의 남쪽에 있던 산으로 경복궁에서도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어요. 목멱산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목 다섯 곳에 봉수대가 있었어요.다섯 곳에 봉수대가 있었던 까닭은 다섯 지역에서 오는 소식을 전달받아 궁에 전하기 위해서였지요. 병조의 관리들은 이튿날 새벽마다 봉수대의 상황을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 알렸어요.목멱산 봉수대 중 동쪽 제1봉은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과 연결되었어요. 제2봉은 경상도와 충청도로, 제3봉과 제4봉은 평안도와 황해도로, 제5봉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연결되었고요.지금은 각 봉수대 위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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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08-28
2
해안선을 따라 설치되었던 연대
봉수대는 설치되는 곳에 따라 이름이 달랐어요. 목멱산의 봉수는 한양에 있어서 경봉수라고 해요. 바닷가와 국경 지역의 봉수는 연변 봉수라고 하지요. 연변 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해주는 것은 내지 봉수라고 하고요.봉수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연대도 있어요. 연대는 해안가를 따라 설치되었지요. 제주도의 경우 봉수가 25개, 연대가 38개소가 있었다고 해요. 봉수가 제주의 오름에 설치되었다면 연대는 해안지역 언덕 지대에 설치되었어요.돌로 쌓아진 연대에서 적의 움직임을 살폈지요. 돌을 둘러쌓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을 두었어요. 봉수대와 마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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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08-28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봉수군의 하루
봉수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담당하던 군인을 봉수군 혹은 봉군, 봉졸이라고 해요. 그들은 봉수대가 있는 마을 주민 중에서 뽑혔어요. 봉수대가 있는 산 정상에 만들어 놓은 주거 시설에 살며 교대로 임무를 담당했어요.봉수군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중요한 임무는 봉수를 피우는 것이었지요. 봉수를 피울 소나무나 버드나무, 짐승과 가축의 똥을 모으는 일도 했어요. 비가 오면 땔감을 구할 수 없으니 항상 넉넉하게 봉화를 피울 재료를 마련해 놓는 일도 놓치면 안 되었지요.봉수군 홀로 봉수대를 지키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어요. 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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