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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외교 사절단의 유산, 통신사 기록물
조선이 일본에 보낸 사절단, 통신사
일본은 왜 임진왜란 직후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을까?
통신사를 문화 사절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인들에 가장 인기 있었던 마상재
본에 남아 있는 통신사의 흔적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개항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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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외교 사절단의 유산, 통신사 기록물
통신사 행렬도국사편찬위원회“일본에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니 와서 축하해 달라고 합니다.”“전쟁으로 두 나라 사이가 안 좋은데 무슨 말씀입니까?”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어요. 일본은 도쿠가와 정권 수립 직후 조선에 축하 사절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요. 조선은 과연 사절단을 보냈을까요? 일본이 사절단을 요청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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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29
6
조선이 일본에 보낸 사절단, 통신사
일본의 요청에 조선은 사절단을 보냈어요. 이 사절단이 바로 통신사예요. 통신사는 ‘두 나라 간의 믿음을 나누는 사절단’이라는 뜻이지요. 1404년(태종 4) 조선은 일본에 처음으로 통신사를 파견했어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지요.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전 국토가 황폐해졌어요. 백성들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어요. 한편,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어요. 그는 정권을 잡고 나자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던 거예요.통신사는 시기마다 파견 목적이 달랐어요. 사실 통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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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08-29
5
일본은 왜 임진왜란 직후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을까?
통신사 접대에 드는 비용은 막부 1년 치 예산에 맞먹었어요. 일본이 이렇듯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에 무인 정권을 세웠지요. 이를 에도 막부라고 해요. 막부란 무사 정권을 말해요. 최고 통치자는 쇼군이라고 하지요.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연 뒤 조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정치를 해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선에 사절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거예요. 일본은 조선과 교류를 하며 정치적인 안정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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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29
4
통신사를 문화 사절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은 통신사를 통해 막부의 위상을 강화하고 정치적 기틀을 안정적으로 마련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을 감동시킨 것은 조선의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이었어요. 통신사로 온 문학인, 예술인들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거리마다 통신사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당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오는 일이 드물었던 때라 통신사 행렬은 신기한 구경거리였어요.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의 문화를 사모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아마도 그때 일본인들의 마음은 요즈음 우리나라 케이팝에 매력을 느끼는 외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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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29
3
일본인들에 가장 인기 있었던 마상재
일본 쇼군과 고위 관료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바로 마상재에요. 마상재는 달리는 말에 탄 사람이 그 위에서 눕거나 서는 재주를 부리는 무예예요.일본에서는 조선 마상재가 매우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통신사가 올 때 함께 와달라고 요청했던 거예요. 일본의 기록에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이다’라는 내용도 있어요. 이 기록을 보면 마상재의 인기가 무척 높았던 것 같아요. 조선 마상재에 감명받은 일본 정부는 공연을 펼친 일행에게 갖가지 선물을 내렸다고 해요. 마상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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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08-29
2
본에 남아 있는 통신사의 흔적
일본에는 통신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그중 하나가 후쿠젠지예요. 후쿠젠지는 통신사 일행이 머물렀던 숙소예요. 해안가 절벽에 있는 이 사찰 앞에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펼쳐져 있어요. 이곳은 지금도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는 곳이에요.통신사의 흔적은 일본의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도진 오도리예요. 소년들이 추는 춤이지요. 이는 악사의 연주에 맞추어 사신들의 시중을 들던 소년들이 추던 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하고 있어요. 지금도 일본 한 지역에서는 도진 오도리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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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29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개항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에 파견된 이후 더 이상 보내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다시 사절단을 보내게 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에요. 그 사절단이 바로 수신사예요.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미국에도 외교 사절단이 파견되었어요. 이들은 근대 기관 및 시설들을 살피고 돌아왔지요.수신사는 1876년부터 188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어요. 최초로 파견된 수신사의 정사는 김기수였어요. 그는 일본의 발달한 문물을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일동기유』를 남겼어요. 이 책에는 기차를 처음 본 김기수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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