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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옛 궁궐이 있던 강화도의 고려궁지
고려궁지(인천 강화군)“폐하!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셔야 합니다.”“몽골이 육지에서의 전투는 잘해도 물에서 하는 전투는 못한다고 하니, 그렇게 합시다.”강화도에 있는 고려궁지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고려의 수도였어요. 이곳에서 고려는 개경으로 돌아올 때까지 고려의 대몽 항쟁을 이끌었지요. 이제부터 고려궁지의 이모저모를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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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08-27
7
고려궁지의 역사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어요. 그러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몽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왔어요.고려는 몽골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맞서 싸울 것을 결정했어요. 그리고 수도를 옮길 것을 검토했어요. 그래서 개경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넓은 농토가 있으며, 세금 운송에 편리한 곳을 찾았어요.더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이었어요. 그곳이 강화도였어요. 당시 최씨 무신 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군사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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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08-27
6
승평문
승평문은 고려궁지의 남쪽 문이자 정문으로 조선 시대 경복궁의 광화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승평문은 모두 3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오직 왕만이 행차할 때에 사용하였어요. 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가운데 문이 아닌 양쪽의 문을 사용하였지요.고려 고종이 죽은 뒤 다음 해 태자(후에 원종 임금)가 몽골과 화친을 맺은 뒤 개경으로 떠날 때 승평문의 가운데 문을 지나갔어요.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고 하여 특별히 『고려사』라는 역사책에 기록되었다고 해요.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승평문은 고려 시대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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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08-27
5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유수부 동헌문화재청조선 인조 때 고려궁지에 남아 있던 건물을 수리해 동헌으로 사용했어요. 동헌은 조선 시대에 지방 관청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이후 강화도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지는 관리인 강화유수가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지요.‘명위헌’ 현판 글씨문화재청이 건물은 조선 영조 때 잠시 ‘덕이 밝고 성의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현윤관(顯允館)”이라고 불렸어요. 이후 대대적으로 수리될 당시 이름난 명필 윤순이 쓴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이 걸렸어요. 이 글자는 ‘위엄을 밝히는 곳’이라는 의미이지요.강화유수부 동헌 건물은 녹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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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27
4
유수부 이방청
유수부 이방청은 원래 강화유수부 안에 있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육방 건물 중 한 곳이에요. 이곳 이방청에서는 강화유수를 도와 마을을 다스리는 여러 사무를 맡아보았어요.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 효종 때 당시 강화유수에 의해 건립되었어요.이후 정조 때 부속 건물이 더 만들어졌으며, 여러 차례 추가 건립이 되어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조선 시대 지방 관아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지 연구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요.유수부 이방청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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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27
3
강화 동종
강화 동종은 옛 남문터 동편 지금의 김상용 선생 순절비 자리에 있었어요. 이후 1977년에 고려궁지를 보수 공사를 하면서 고려궁지 안으로 옮겨왔어요. 이 종의 표면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이라 적혀 있어요.그런데 종이 금이 가고 소리가 고르지 못해 18세기 전반 강화유수 민진원이 큰 규모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이 종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지요.강화 동종은 강화산성(읍성)의 4대문을 열고 닫는 것을 알릴 때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이 종을 훔쳐가려고 갑곶으로 운반하다가 너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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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8-27
2
병인양요의 아픔이 담긴 외규장각 건물
외규장각 건물문화재청늠름한 이 건물은 외규장각으로, 조선 후기에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에요. 정조는 외규장각을 설치한 후 궁궐에 있던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 하고, 외규장각과 내규장각에 의궤를 비롯해 여러 왕실의 기록을 담은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어요.한편,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가 왕실의 보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던 규장각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이 과정에서 5,000권 이상의 책이 불탔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책과 문서 및 은괴 수천 냥이 프랑스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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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08-27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려와 몽골의 강화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의 고통이 심해졌어요.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는 등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어요. 이처럼 피해가 커지자 몽골과 강화를 해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이 실권을 쥐고 있던 최의를 죽임으로써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어요(1258년).이듬해에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훗날 원종)를 몽골로 보냈어요. 그런데 고려의 태자가 몽골로 가던 도중 몽골의 황제인 대칸(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설상가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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