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이순신
세종대왕
한국사
검색
메인 메뉴
고대사
B.C.(기원전)
연천 전곡리 유적
충청 지역의 구석기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신석기시대)
단군왕검
최초의 국가, 고조선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인돌 유적
청동기
부여 송국리 유적
주몽
영산강 유역의 마한 유적
박혁거세
온조
100년대
김수로왕
200년대
고구려 산성
고구려 고분 벽화
300년대
가야 고분군
근초고왕
광개토 대왕
장수왕
400년대
평양의 문화유산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
신라 대릉원 유적
500년대
이사부
왕산악과 우륵
법흥왕
성왕
무령왕릉
진흥왕
백제 부여 유적
삼국 및 가야의 문화
김유신
600년대(전반기)
김춘추
삼국의 한강유역 쟁탈
을지문덕
원효
경주 첨성대
연개소문
문무왕
신라 속 서역의 유물
백제 금동 대향로
600년대(후반기)
삼국의 불상
삼국의 탑
경주 남산
동궁과 월지
신문왕
경주 문무 대왕릉
대조영
발해 문화
700년대
혜초
발해의 성장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 대왕 신종
800년대
장보고
청해진 유적
최치원
900년대
후삼국의 성립과 통일
고려사
800년대
왕건
900년대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개성 만월대 유적
팔관회와 연등회
고려청자
고려의 탑
고려의 불화
광종
최승로
서희
강감찬
고려 불상
현종
고려의 화폐
1000년대
의천
윤관
김부식
1100년대
정중부
묘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지눌
만적
1200년대
김윤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고려궁지
삼별초의 항몽유적
1300년대
고려 침몰선
최영
최무선
문익점
공민왕
정몽주
고려 시대 목조 건물
직지심체요절
조선사
1300년대(전반기)
조선의 건국
이성계
정도전
태종 이방원
박연
세종대왕
향교와 서당
봉수
하회 마을과 양동 마을
1300년대(후반기)
경복궁
종묘와 사직
조선의 신분제
조선의 지방관, 수령
한양도성
성균관
분청사기와 백자
조선 왕릉
1400년대
전주의 문화유산
창덕궁
조선의 화폐
조선왕조실록
장영실
농사직설과 삼강행실도
조선의 과학기구
훈민정음
조선의 회화
조선의 화약 무기
경국대전
창경궁
사화
1500년대(전반기)
이황
신사임당
이이
권율
허준
유성룡
이순신
사명대사
1500년대(후반기)
서원
김시민
곽재우
조선의 지도
허난설헌
광해군
임경업
임진왜란
1600년대(전반기)
통신사 기록물
의궤
조선의 세시 풍속
조선의 관혼상제
조선의 서민 문화
조선 시대 서양 문물
효종
1600년대(후반기)
동의보감
정묘·병자호란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안용복
영조
울릉도와 독도
1700년대
풍속화
홍대용
박지원
김만덕
김홍도
정조
정약용
김정희
수원 화성
1800년대
김정호
홍경래
김대건
최제우
근대사
1700년대
덕수궁
1800년대(1)
박규수
양헌수와 어재연
흥선 대원군
최익현
김홍집
김옥균
전봉준
이준
박은식
윤희순
최재형
헐버트
서재필
이회영
홍범도
1800년대(2)
개항기 강화도 유적
절두산 순교 성지
이상설
양기탁
남자현
주시경
김구
신돌석
안창호
안중근
한용운
신채호
조만식
여운형
1800년대(3)
김좌진
인천 개항장 유적
근대 교육
근대 시설
김마리아
김원봉
방정환
대한제국
정동
서촌
근대 건축물
의병 운동 유적
동학 농민 운동
1900년대(1)
이봉창
권기옥
유관순
이육사
전형필
윤봉길
국채 보상 운동 유적
을사늑약과 국권상실
일본의 식민지 조선 통치
서대문 독립 공원
부산 근현대 역사 유적
1900년대(2)
손기정
윤동주
3·1 운동 유적
신흥 무관 학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유적
의열단 의거지
한국 디아스포라의 역사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 유적
근대 역사 도시 군산
현대사
1800년대
유일한
1900년대
전태일
제주 4·3 사건 유적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전쟁 유적
비무장 지대와 판문점
4·19 혁명 유적
현대 생활 문화
한국 경제의 성장과 사회의 변화
우리나라 정부의 통일 노력
5·18 민주화 운동 유적
6월 민주 항쟁 유적
한국사지식인
박물관
역사기행
고객센터
홈으로
사이드바
메뉴
고대사
고려사
조선사
근대사
현대사
한국사지식인
박물관
역사기행
고객센터
장영실
장영실
좌측 날개
우측 날개
장영실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노비 출신 장영실, 궁궐에 들어가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궁궐에서 쫒겨나다
닫기
Total 5 /
1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검색대상
제목+내용
제목
내용
회원아이디
작성자
검색어
필수
검색
RSS
장영실 목록
장영실 목록
5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국립고궁박물관(서울 종로구)“임금께서 노비 출신 기술자를 중국에 보내려 하신다고요?”“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대체 장영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그러신 답니까?”천한 신분이었던 장영실이 세종의 눈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종은 왜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내려고 했을까요?
지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
08-28
4
노비 출신 장영실, 궁궐에 들어가다
장영실은 세종 시기 과학 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에요. 원래는 부산 동래현의 관노비였어요.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라고 전하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해요. 천한 기생의 아들이었기에 관청의 노비가 되었던 거예요. 어머니를 따라 동래현 관노비로 지냈던 장영실은 손재주가 남달랐어요.“영실아, 또 무엇을 고치고 있느냐?”“농기구가 고장 나 고치는 중입니다.”“우리 영실이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걸.”“저건 하늘이 내린 재주일세.”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뚝딱 만들어내고, 고치곤 했지요. 농기구며 무기며 못 고치는 게 . . .
지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
08-28
3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다
궁에 들어간 장영실은 상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상의원은 왕의 옷을 관리하던 기관이었지요. 손재주가 남달랐던 영실은 그곳에서도 눈에 띄었지요. 훗날 그의 뛰어난 재주에 대한 소식은 세종대왕 귀에까지 들어갔어요.“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려면 하늘을 잘 읽어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느니라.”조선은 왕의 큰 임무 중 하나가 하늘을 잘 살피는 것이었지요. 농경 사회에서는 씨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와 날씨의 변화를 아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성문을 열고 닫으려면 정확한 시간을 알아 . . .
지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8
08-28
2
조선의 시간을 찾다
“아니, 기생의 자식에게 그런 벼슬을 내리다니 안 될 일이오.”“기생의 자식이니 그 정도 벼슬이 딱 적당하지 않겠소?”세종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명령을 내렸어요.“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하노라!”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이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관리가 되었어요. 벼슬까지 얻은 그는 더욱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어요. 세종의 명을 받아 혼천의를 만들었어요. 당시 만들어진 혼천의는 하늘의 움직임을 읽는 기구인 동시에 천문시계였어요.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고, 훗날 이를 기준으로 조선의 달력도 만들 . . .
지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6
08-28
1
궁궐에서 쫒겨나다
높은 벼슬을 하며 세종의 사랑을 받던 장영실이 궁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어요. 바로 가마사건 때문이었지요.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던 세종은 온천에 자주 다녔어요. 온천에 갈 때 탈 가마 제작을 감독한 사람이 바로 장영실이었어요. 그런데 그 가마가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거든요.“장영실이 왕의 가마를 감독해 제작했는데, 튼튼하지 못해 부서지게 했으니 곤장 일백 대를 쳐야합니다”신하들은 왕이 다치진 않았지만 왕의 존엄을 해치는 불경죄를 지었다며 곤장을 치고, 장영실을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세종은 벌을 감해주 . . .
지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
08-28
TOP
목록
Complete!
수정이 완료 되었습니다.
확인
최근글
글이 없습니다.
1
(current)
새댓글
글이 없습니다.
1
(current)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