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달력을 이용한 조선
본문
“이달 초하룻날 사시(9시~11시)에 일식을 할 것입니다.”
천문관이 태종에게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어요. 태종은 흰옷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월대에서 하늘의 변화를 기다렸지요. 그러나 오시(11시~13시)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일식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결국 일식 시간을 맞추지 못한 천문관은 옥에 갇혀 처벌을 받았지요.
조선 시대 천문을 잘못 예보한 천문관은 심한 경우 곤장을 맞기도 했고, 먼 곳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어요. 일식 시간을 못 맞춘 천문관을 벌 줄 만큼 조선의 왕들은 왜 하늘의 변화에 관심이 많았을까요?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었어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거나 새 임금이 되면 하늘의 시간을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했어요. 그래야 때를 맞춰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할 수 있거든요.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계절 변화를 예측해서 농사지을 때를 알려주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반면에 기상이변으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나 큰 피해가 생기면, 백성들은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어요. 특히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특이한 천문 현상이 생기면 임금은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자신의 통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일식을 준비하는 임금과 신하들
임금이 천문 현상에 관심을 많이 가질수록 천문관들의 역할은 더욱 커져 갔어요. 그런데 천문관들은 일식이나 월식을 목숨을 걸고 계산하는데 왜 자꾸 틀리는 일이 생길까요?
일식과 월식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매일 관찰하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달력(역서, 책력)이 있어야 계산할 수 있었어요. 달력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각, 해·달·별의 움직임, 월식과 일식, 절기 등을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했어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에서 만든 달력을 구해 썼어요. 조선시대에도 달력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어요. 사신들은 매년 중국에 가서 황제를 만나고 새 달력을 얻어왔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만든 달력은 베이징에서 관찰하고 측정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라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았어요. 조선의 천문관들은 중국 달력을 기준으로 하면서도 조선에 맞는 값으로 날짜를 다시 계산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하려해도 조금씩 오차가 생겼어요. 심한 경우 중국의 달력에 기록된 일식이 조선에서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세종 시기에도 여러 차례의 일식과 월식이 있었어요.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소복을 입고 월대에 엎드려 해가 다시 빛나기를 빌었어요. 그런데 일식이 천문관의 예측과 달리 1각(15분)이 늦게 시작되었어요. 잘못 예보한 천문관은 곤장을 맞았지요.
세종은 더욱 정확한 예보를 원했어요. 농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일 년의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기준에 맞는 달력이 필요했어요.
세종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중국의 간의를 연구하여 해와 달, 별을 정확히 관측할 수 있는 조선의 간의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의 북쪽에 간의대를 만들었어요. 간의대에서는 매일매일 천문관들이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꼼꼼히 관측하고 기록했어요.
세종이 임금이 된지 26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여러 해의 관측 결과를 이용해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담은 조선의 달력 『칠정산』이 편찬되었어요. 칠정이란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을 기록한 책이에요. 책에 기록된 자료를 계산하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식과 월식을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자신의 하늘을 관측하여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뿐이었어요. 세종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자신의 하늘을 스스로 관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하늘과 계절의 정확한 규칙과 질서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면서 세종은 조선을 더욱더 체계적인 유교 국가로 만들어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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