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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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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 청산리에서 크게 승리하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다
교육 계몽운동을 펼치다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다
일본군에 맞설 준비를 하다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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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좌진, 청산리에서 크게 승리하다
백야기념관(충남 홍성군)“이보게, 자네 소식 들었나? 만주에서 일어난 일말일세.”“들었지. 만주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는군.”“어제는 통쾌해서 잠까지 설쳤다네. 독립군이 참으로 자랑스럽네.”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사건이 일어났지요. 독립군이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은 어디일까요? 당시 우리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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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9-01
6
노비 문서를 불태우다
김좌진의 집안은 충청남도 홍성 지방에서 소문난 부자였어요. 큰 기와집에 많은 노비를 거느렸고, 한 해 농사만 2천 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어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좌진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하였어요.김좌진은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했어요. 강직하고 무인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지요.김좌진의 고향 홍성은 홍주의병이 크게 일어난 곳이었어요. 그는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복한으로부터 항일 의식을 익혔으며, 계몽지식인 김석범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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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9-01
5
교육 계몽운동을 펼치다
자기 집안의 노비를 먼저 해방한 후, 김좌진은 교육운동에 뛰어들었어요.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호명학교를 세우는 김좌진1907년 김좌진은 고향에 ‘호명학교’를 세웠어요.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고 정작 자신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김좌진은 학교를 세워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고자 하였고,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심어 주고자 하였지요.김좌진은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어요. 그는 신교육운동의 전개와 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해 국권 회복을 위해 온 힘을 쏟았어요. 청년학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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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09-01
4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애국지사들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계획 하였어요. 그러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어요. 김좌진 역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고 있었지요. 그러던 1911년 어느 날 김좌진은 중국에서 온 동지를 만났어요.“김 동지! 무기 구매 자금으로 10만 원이 필요하오.”10만 원이라면 당시에는 엄청난 액수의 큰돈이었어요. 김좌진이 이제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두어들인 돈은 3만 원이었어요. 땅도 팔았지만, 그래도 5만 원이 부족했어요.고민 끝에 김좌진은 먼 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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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09-01
3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다
김좌진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격렬하게 항일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1918년 그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갔어요. 그리고 그는 만주 지역 독립 운동가와 함께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어요.1919년 김좌진은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군사 책임을 맡았어요. 그는 대한정의단을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사령관이 되었지요. 그는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는데 힘을 쏟았어요. 또한 국외에서 다량으로 무기를 사들여 와 독립군의 힘을 키웠지요.군정부는 다시 이름을 ‘북로 군정서’로 바뀌었어요. 김좌진은 독립군 부대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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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9-01
2
일본군에 맞설 준비를 하다
일제는 독립군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더구나 지난번 봉오동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크게 화가 나 있었지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하였지요.한편 김좌진의 독립군은 본부를 장백산으로 옮기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지요. 1920년 10월 중순 독립군은 중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이르렀어요. 일본군의 공격 소식이 들리자, 독립군 부대들도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지요.“장군! 시베리아에 출동했던 일본군 부대가 장고봉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장군! 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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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09-01
1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의 울창한 숲 속에 숨어 있었어요. 독립군은 일본군을 숨죽여 기다렸어요. 일본군이 나타나면 일제히 공격할 생각이었지요.“이제 일본군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10월 21일 새벽이 밝았어요. 수많은 일본군이 길게 늘어서며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어요. 일본군은 독립군이 청산리 골짜기 곳곳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이 행군해 왔어요. 어느새 청산리 계곡은 일본군으로 까맣게 뒤덮여 갔지요.이때 어디선가 권총 소리가 들려 왔어요.“땅! 땅땅!”이범석 장군의 권총 소리였어요. 독립군은 이 권총 소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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