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근대 국가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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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자신처럼 북촌에 살고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자주 찾아갔어요.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청을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그는 청에 들어온 서양의 근대 문물을 본 후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을 개화사상이라고 해요. 박규수의 제자가 된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요. 그리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훗날 뜻을 같이하게 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만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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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인 개화당 사람들




그러던 중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어요. 이때 박규수는 개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고종은 박규수의 주장을 받아들였어요.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을 비롯하여 3개의 항구를 개항했어요.

1881년 조선 조정은 일본에 ‘조사시찰단’, 청에 ‘영선사’를 보냈어요. 두 나라가 어떻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죠. 이를 바탕으로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려는 정책을 펼쳤고 신식 군대도 만들었어요.


1882년 큰 일이 벌어졌어요.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보다 차별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어요. 바로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왕비가 궁궐에서 몸을 피해 장호원까지 도망갔어요. 임오군란은 청의 군대가 들어와 진압되었어요. 그 후 조선 조정은 청의 간섭을 받게 되었어요.


“조선이 근대 사회가 되려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해요. 또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여러 가지 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청의 보호를 받으면서 외교를 펼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에요.”


임오군란 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함께 개화사상을 공부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어요. 김옥균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하루빨리 근대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김옥균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급진 개화파 또는 개화당이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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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절단으로 간 사람들(18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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