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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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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유적
민족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6·25 전쟁
6·25 전쟁이 일어나다
전쟁의 잔인함을 간직한 한강 인도교
낙동강 방어선 최대 전투지 다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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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유적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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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민족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6·25 전쟁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경기 파주시)“38선에서 군인끼리 또 총을 쏘아댔다며?”“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빨리 부대로 돌아가라는 지프차의 방송을 보면 이번은 작은 충돌이 아닌 것 같아.”“작은 충돌이 아니면... 그럼 진짜 전쟁이라도 났단 말이야?”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때 일어난 전쟁은 약 3년 넘게 계속되었어요. 3년의 전쟁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전쟁은 또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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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9-02
6
6·25 전쟁이 일어나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만들어지고, 한반도에 서로 다른 이념을 따르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어요. 1948년 8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다음달인 9월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세워졌어요. 남한과 북한은 서로 통일을 주장하였어요. 그리고 38선을 넘나들며 개성, 옹진반도 등에서 서로 작은 규모의 충돌을 계속했어요.1949년에 남한에 있던 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였어요.숭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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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09-02
5
전쟁의 잔인함을 간직한 한강 인도교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라디오에서는 용맹스런 우리 국군이 바로 반격을 해 적을 물리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어요. 많은 서울 시민들이 방송을 믿고 일상생활을 계속했어요.그러나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 외곽 북쪽에 나타났어요. 북한군의 빠른 진격에 다급해진 시민들과 전선에서 후퇴하는 군인들이 한강인도교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한강인도교는 당시 서울 시내에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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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09-02
4
낙동강 방어선 최대 전투지 다부동
낙동강을 지키는 군인과 전투 후 파괴된 북한 탱크국가기록원“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 물러나면 바다뿐이다.”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의지해 막아섰어요.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은 다부동이었어요. 다부동 지역을 빼앗기면 대구를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때문에 다부동에서의 전투는 매우 처참했어요. 산을 오르며 총을 쏘고,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직접 몸으로 적과 부딪쳐 싸우는 백병전도 자주 벌어졌어요. 비 오는 날이나 어두운 밤에는 백병전이 더 심했어요. 고지 하나를 낮에는 국군이 빼앗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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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09-02
3
고지쟁탈전으로 벌거숭이가 된 백마고지
백마고지(강원 철원군)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도 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고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백마고지는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고, 고지를 차지하면 넓은 철원평야도 얻을 수 있었어요.국군과 중국군은 작은 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 서로 10여 일 동안 12차례나 고지를 차지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어요. 심지어 하루에도 많게는 5번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어요. 고지를 공격하기 전에는 항상 대포를 먼저 쏘았는데, 국군은 약 22만 발, 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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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9-02
2
피난민의 고단한 삶을 안아준 부산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면서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요. 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후퇴를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피난민들은 기차를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발로 몇 달을 걸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부산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어요. 그러자 정부는 급하게 피난민이 모여 살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어요.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난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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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09-02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 철수 작전
중국군에 고립된 10만여 명의 유엔군이 탈출하기 위해 35만 톤의 군수물자를 가지고 흥남 부두로 왔어요. 유엔군을 따라 동해안 지역의 피난민도 항구로 몰려들었어요.“군함에 민간인을 태울 수는 없소! 병력과 물자를 옮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오.”“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습니다!”“피난민을 배에 태울 수 없다면 우리 국군은 피난민과 함께 걸어서 38선을 넘을 것입니다.”미군 군사고문이었던 현봉학은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에게 피난민들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어요. 피난민 탈출에 김백일 제1군단장도 한목소리를 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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