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학교,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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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은 1886년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세운 학교에요. 스크랜턴 부인은 1885년 선교사이자 의사인 아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박사와 함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어요.
서울에 들어온 스크랜턴 부인은 미국 공사관이 있었던 정동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정동의 한 초가집에서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작이에요.
스크랜턴 부인이 처음으로 가르친 여학생은 학교에 올 당시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어요. 그녀는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사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이 여학생은 학교를 나오기 시작한 후 약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다행히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하면서 학교는 유지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당시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여학생을 모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어느 날 한 학생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데려가겠다며 스크랜턴 부인을 찾아왔어요. 그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 서양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에요.
즉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데려간다는 이야기였어요. 스크랜턴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스크랜턴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와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어요.
… 딸을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지만, 부모의 허락 없이는 미국은 물론 조선 안에서 10리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로 서약합니다.
스크랜턴 부인이 여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1887년에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어요. 이때부터 여학생 모집이 이전보다 쉬워졌어요. 이화학당은 학교 이름을 받기 1년 전인 1886년 학교 건물을 한옥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어요. 학교 앞마당을 잔디와 꽃나무로 꾸몄다고 해요. 그러자 부녀자들이 명절 때가 되면 이화학당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해요. 많을 때는 천 명이 넘기도 했다고 해요.
“학교에는 처음부터 통역도 하지 않고 영어로 가르쳐주었어요.”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던 한 학생이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며 한 말이에요. 이화학당은 배재학당처럼 영어로 수업을 했던 것이죠. 덕분에 이화학당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로 여의사가 된 김점동(박에스더)이에요.
이화학당 학생들도 영어만 배운 것은 아니에요. 배재학당처럼 한문을 비롯한 지리, 체조, 재봉 등 여러 과목을 배웠어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어요. 학생들이 체조를 배운다는 소문이 돌자 자기의 딸들을 학교에서 데려가는 학부모들이 생겨났어요.
당시 사람들은 여자가 다리를 들어 올리며 체조를 하는 것을 양반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는 양반 출신 가문들은 이화학당에 다닌 여자는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는 일까지 생겼다고 해요.

이화학당의 체육시간(191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체조 수업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학교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어요. 학생들은 점점 늘어나서 1890년대에는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박영효의 딸까지 이화학당에 와서 공부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화학당은 세워지고 나서 한동안 교육과정이 완전히 갖추어지진 않은 상태로 운영되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두 번째로 입학한 학생은 약 10년 동안 학교에 머물렀다고 하니 말이에요.
이화학당이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마련한 것은 1904년이에요. 당시 이화학당의 학당장이었던 페인이 정부 인가를 얻어 4년제 중학교를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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