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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가 인쇄된 곳은 어디일까? 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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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유적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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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온 민족이 일어나 독립을 외친 3·1 운동 유적
3·1 운동 당시 만세 장면국가기록원“우리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만세! 만세! 만세!”“책을 던지고 밖으로 나가 행진합시다.”“와~”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학생들까지 과감하게 들고 일어나 만세를 외친 것은 3·1 운동 때의 일이에요. 3·1 운동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3·1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닌 사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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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09-02
7
전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어요. 월슨의 14개조 원칙은 각 민족의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로 알려져, 일제에 맞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지요.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2·8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어요. 국내에서도 일찍부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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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09-02
6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곳은 어디일까? 보성사
3·1 운동은 바로 독립선언서의 낭독과 함께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2만여 장이 넘는 독립선언서는 어떻게 일본 경찰에 발각되지 않고 인쇄될 수 있었을까요?그것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라는 인쇄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보성사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2월 27일 직원들과 함께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했어요. 다음날 승동교회에 모인 전문학교 학생 대표단들에게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또 전국으로 전달되었어요.그런데 그 사실 아세요? 3·1 운동 당시 배포된 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의 독립국’을 ‘선조의 독립국’ 이라고 거꾸로 인쇄되었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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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
5
민족 대표들은 왜 경찰에 스스로 잡혀간 것일까? 태화관
이종일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에게 받은 거금 5,000원을 주면서 사정했어요. 그 돈을 받는 친일 경찰이 눈감아 준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막상 3월 1일이 되자 그들 중 29명이 탑골 공원이 아닌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였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했어요. 종로경찰서에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했지요. 얼마 후 일본인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이들은 끌려갔어요. 그런데 왜 이들은 원래 계획된 탑골 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이게 된 것일까요?그것은 탑골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흥분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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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09-02
4
만세 운동이 시작된 탑골 공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 공원에는 200여 명이 넘는 학생과 사람들이 모여 민족 대표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자 한 청년이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어요.우리들은 지금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하노라. 이러한 사실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서 인류 평등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분명히 밝히고, 이러한 사실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하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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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09-02
3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벌인 대한문 앞
탑골 공원에서 출발한 시위대들은 어디로 이동했을까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움직였는데, 그중 한 갈래가 향한 곳이 덕수궁 대한문 방향이었어요.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인 사람들은 고종 황제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려 했어요.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었어요. 대한문 앞은 만세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독립을 맞은 세상 같았어요.이들은 서울 시내를 돌며 시위를 벌이다 남산에 있는 조선 총독부로 향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시위대를 막아서는 일본군의 총 칼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어요.대한문 앞에 모인 군중들(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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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09-02
2
일본의 무자비한 보복이 이루어진 곳은? 수원 제암리 교회
3·1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쳐 경기도 수원, 안성 등지에서 만세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었어요. 4월 15일에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 장날에 맞춰 400여 명이 시장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어요. 계속된 시위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의 배후에 천도교인와 기독교인이 있다고 생각했어요.1919년 4월 15일 오후 늦게 일본군인과 순사들이 제암리에 왔어요. 그들은 제암리 교회당에서 강연이 있다고 말하면서 20여 명의 남자들을 교회당으로 불러 모았어요.그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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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09-02
1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용감한 행동을 한 일제 강점기 어린이들
일제 강점기 어린이들도 독립운동을 하거나 만세 시위에 참여했을까요? 어린아이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어른들이나 할법한 일을 한 용감한 어린 소년이 있었어요. 그 소년이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기록에 따르면 13세의 김 아무개라는 소년이라고 해요. 어느 날 그 소년은 초선총독부 건물 문에 태극기를 붙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어요.이 문은 총독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의 독립정부에 속한다. 만세! 만세! 만세!김○○ 씀. 나이 13세, 집 주소 ○○○동 21번지하지만 곧 일본 경찰에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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