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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일본에 맞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다
을미의병, 그 속에 신돌석이 있었다
을사늑약에 반대해 다시 의병이 일어나다
신돌석, 주막 앞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일본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유격전을 펼치다
의병 부대의 해산과 장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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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신돌석 장군 생가(경북 영덕군)“일제가 강제로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 하고 있소!”“어찌하면 좋을까요?”“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일본인을 몰아내기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받쳐야 하지 않겠소.”강제로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망해가는 대한제국을 구하고자 전국의 많은 의로운 백성들이 일어났어요. 의병 부대를 이끈 사람은 대부분 양반 출신의 유생들이었어요.그러나 평민 출신으로 의병 부대를 만들어 활약한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신돌석 장군이지요. 그는 의병 부대를 이끌고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장군은 어떤 뜻을 품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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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31
6
일본에 맞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다
동학 농민군을 힘으로 제압하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 정치에 더욱 많은 간섭을 하였어요. 이때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고 아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었어요.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압박해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차지한 요동 땅을 청에 다시 돌려주게 했어요.러시아의 입김에 꼼짝을 못하는 일본을 보면서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하고자 했어요. 고종은 조정에서 친일파 신하들을 몰아내고 친러파 신하들을 여러 명 등용했어요.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서의 불리해진 상황을 되돌려 놓고 싶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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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31
5
을미의병, 그 속에 신돌석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은 대부분 그 고을의 유명한 유생들이 이끌었어요. 이들은 친일 개화파의 개화 정책에 동조하며 단발을 한 관료들을 처단하였어요.개화 정책으로 새로 만들어진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신선을 파괴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를 방어하던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요. 이들 의병 속에 신돌석도 있었어요.신돌석은 1878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영덕)에서 태어났어요. 원래 이름은 신태호이지만 아이 때의 이름인 돌석으로 더 널리 알려졌어요.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기운이 셌다고 해요. 19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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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31
4
을사늑약에 반대해 다시 의병이 일어나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결국 일본이 승리하였어요. 이때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꺼린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지했어요.프랑스 만화가가 그린 만평 ‘조선을 둘러싼 일·청·러’(위), 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아래), Georges Ferdinand Bigot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것을 당연시했어요. 미국과 영국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때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미국, 영국, 러시아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보호조치를 할 수 있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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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08-31
3
신돌석, 주막 앞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906년, 을사늑약에 대한 소식을 들은 신돌석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어요.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장소는 그의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주막 앞이었어요. 양반 유생들이 대부분 서원이나 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모습과는 무척 달랐지요.“포악한 왜놈들이 황상 폐하를 협박하여 조선을 차지하려 하오! 나라가 위급한데 내 한목숨이 어찌 아깝겠소!”“옳소! 와! 와!”“나를 따라 우리 땅에서 왜놈들을 몰아냅시다!”신돌석을 따르던 의병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어요. 농민 이외에도 상인, 포수, 그리고 양반 출신들도 여럿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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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08-31
2
일본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유격전을 펼치다
신돌석 의병 부대를 비롯해 경상도의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펼쳐지자,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의병 부대를 진압하려고 했어요.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일본군이 몰려왔어요. 신돌석은 정면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워서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어요.신돌석은 부대를 작은 규모로 나눠서 유격전을 펼쳤어요. 이미 태백산맥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공격하고 태백산맥으로 도망가 숨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죠. 한여름의 더위와 장마 속에서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쫓고 쫓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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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31
1
의병 부대의 해산과 장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1908년 9월 이후, 신돌석 의병 부대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요. 일본군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은 계속 줄어들었어요.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의병의 수도 줄어들고 무기와 식량을 구하는 것도 갈수록 어려워졌어요.게다가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요. 어쩔 수 없이 신돌석은 후일을 약속하며 의병들에게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어요.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신돌석은 고향 근처 마을로 갔어요. 마을에는 옛 부하 김상열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장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참으로 잘 오셨소. 오늘 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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