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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정조의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 화성
정조, 수원 화성을 건설하다
정문과 후문에 옹성을 쌓은 이유는? 장안문과 팔달문
왜 속이 텅 빈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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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임금이 머물 궁을 지은 이유는? 화성 행궁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특별했던 수원 화성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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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 화성
수원 화성(경기 수원시)문화재청“수원 화성에서 큰 잔치가 열린다는군.”“잘하면 화성에 행차하시는 임금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앞으로도 임금님께서 화성 근처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에 자주 오실 테니, 뵐 기회가 더욱 많아지겠지.”수원 화성이 건설된 것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임금 때예요. 정조가 수원 화성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원 화성만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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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08-30
7
정조, 수원 화성을 건설하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사도 세자)를 여의었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본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컸지요.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의 묘를 더 좋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어요.정조는 화산에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원래 화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할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화성이예요.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수원이지요.화성은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의 꿈이 담긴 신도시였지요. 1794년(정조 18) 1월에 시작한 공사는 1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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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08-30
6
정문과 후문에 옹성을 쌓은 이유는? 장안문과 팔달문
장안문과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북쪽과 남쪽에 있는 문이에요. 둘 중 어떤 것이 정문일까요?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에요. 장안문은 임금님이 한양에서 수원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통과하게 되는 문이라 북쪽에 있는데도 정문이 될 수 있었지요.옹성을 갖춘 장안문과 팔달문정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은 특이한 모양을 한 성문이에요. 모두 항아리를 반으로 쪼개 놓은 것 같은 반원형의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런데 왜 이런 특이한 구조의 옹성을 만든 것일까요?그것은 바로 적군이 성문 앞으로 다가오면, 성문 위와 옹성에서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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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08-30
5
왜 속이 텅 빈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공심돈
우리나라 성곽 중 수원 화성에만 볼 수 있는 건축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공심돈이지요. 공심돈은 중국의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건축물이에요. 원래 수원 화성에는 공심돈이 세 개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아 있지요.앞에서 본 서북 공심돈은 높이가 약 13m인데 아래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부분은 벽돌을 구워서 만든 것이 특징이에요. 안이 텅 빈 구조로 군사들이 안에서 밖의 적군을 살피며 화살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지요. 적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구조예요. 수원 화성이 만들어진 후 이곳을 방문한 정조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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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08-30
4
물길이 통과하는 문이 있다고? 화홍문
화성에는 물길이 통과하는 두 개의 문이 있어요. 북수문과 남수문이지요. 북수문의 이름이 바로 화홍문이에요. 문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화홍문이라고 불렀어요. 화홍문을 통과한 물은 수원성을 가로 질러 흐르지요.그런데 잘 들여다보세요. 다리 위 누각에 구멍이 보이지요. 바로 적이 쳐들어 올 때 공격할 수 있는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놓은 거랍니다.화홍문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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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3
화성에 임금이 머물 궁을 지은 이유는? 화성 행궁
화성에는 행궁이 있어요. 행궁은 임금님이 밖으로 행차했을 때 머무는 궁이에요. 그런데 모든 성에 행궁이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답니다. 조선 시대에는 온양 행궁을 비롯하여 모두 5개의 행궁이 있었어요. 그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 화성 행궁이에요.이곳에 행궁을 지은 이유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서였지요. 정조는 화성 행궁을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큰 규모로 지었어요. 그 이유는 훗날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이 이곳에서 살려고 했기 때문이래요.수원 화성 행궁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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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08-30
2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특별했던 수원 화성 공사
수원 화성 축조 현장일꾼: 웬일로 저를 찾아 오셨나요?학생: 수원 화성을 답사하고 나서 화성 건설에 참여하셨던 분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일꾼: 무엇이 그리 궁금해서입니까? 저는 건설의 총 책임자도 아니고 동원된 일꾼이었을 뿐인데.학생: 그래서 더 만나 뵙고 싶었던 거예요. 수원 화성 건설이라는 큰 공사가 2년 8개월 만에 끝났다고 하던데, 포크레인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가능했나요?일꾼: 포크레인은 없었지만, 정약용 선생이 만든 거중기와 녹로 등 신식 기구가 있지 않았습니까?학생: 그게 그렇게 큰 역할을 했나요?일꾼: 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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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08-30
1
수원 화성 건설의 일등 공신, 거중기와 녹로
수원 화성의 건설 공사 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줄어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거중기와 녹로 때문이었어요. 거중기는 정약용이 중국의『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해 만들어낸 기구예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랍니다. 수원 화성 건설 때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대요. 왕실에서 직접 만들어 공사 현장으로 내려 보냈다고 하니, 정조가 얼마나 수원 화성 건설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지요?거중기와 함께 사용되었던 기구가 또 있어요. 바로 녹로지요. 이것도 정약용에 의해 발명된 기구에요. 성이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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