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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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어요. 그중에는 중국 사람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기 위해 만든 단체도 있었어요.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 앞에서 여러 차례 연설도 하였어요. 이제 여운형은 중국에서도 우리 민족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어요.


1929년 여운형은 우리나라로 돌아왔어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이에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지 12년 만의 일이었어요.


국내에 온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여러 달 동안 조사를 받은 후 재판을 받았어요. 여운형이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이를 보기 위해 몰렸어요. 그러다 보니 재판이 연기되기도 했어요.

여운형은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어요. 일본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다시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선중앙일보 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했어요. 이 시기 여운형은 다 쓰러져가던 이순신 장군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는 일을 했어요. 또 김구 선생의 가족들이 상하이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 일제의 감시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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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감옥에서 나온 안창호를 위로하는 여운형(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9월 5일부터 자진 휴간을 하다가 1937년 11월 폐간되었어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대한 기사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 신문사는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가 잘 보이지 않도록 지웠거든요. 일제는 신문사 사장을 그만둔 여운형에게 자신들을 위해 일할 것을 권했어요.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여운형은 일제의 이런 요구들을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여운형은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일제가 곧 망하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여운형은 이 사실을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이야기했어요. 소문은 점점 퍼져나갔어요. 일제는 이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여운형을 다시 체포해 일본 편에 서라고 협박했어요. 집요한 협박에 굴하지 않던 여운형은 또 감옥살이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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