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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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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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일제가 물러난 후를 대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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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시민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어요. 당시 대부분의 민족운동가는 해외에서 이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광복 후 바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여운형은 달랐어요. 광복 전 1944년 8월 비밀리에 만든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보통은 글자를 줄여 ‘건준’이라고 불러요. 여운형은 ‘건준’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러나 여운형과 ‘건준’의 활동은 쉽지 않았어요. 남한에 온 미군이 그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상황은 점점 나빠져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지게 되었어요. 여운형은 이를 막기 위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어요. 또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났어요.


미군정은 이런 여운형의 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북한으로 가지 못 하도록 말렸어요. 이에 대해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내 집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손님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나 우리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여운형의 노력은 더는 계속될 수 없었어요. 1947년 7월 19일 한지근이라는 자가 쏜 총을 맞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거든요. 1947년 8월 3일 장례를 치르던 날 많은 사람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동대문까지 가득 채우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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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모인 많은 사람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예요. 하지만 광복 후 세워진 정부에서 한동안 그의 활동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2008년 그 업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게 되었어요.


여운형이 총탄에 쓰러지지 않고 ‘건준’을 통해 좀 더 많은 활동을 했다면 광복 후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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