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좌측 날개
우측 날개

일제와 타협하지 않다

페이지 정보

프린트 링크복사 목록


본문

1920년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1910년대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사람 중에 일제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에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우리 민족이 펼친 3·1 운동을 지켜본 일제가 식민 통치 방법을 바꾸었기 때문이에요. 일제는 “우리의 문화를 존중하고 정치에서 자치권을 준다.”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해서였죠.


실제로 1920년대에 일제와 타협하여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이들은 훗날 대부분 친일파가 되지요.


조만식은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신간회’라는 단체를 만드는 데 앞장섰어요. 1927년에 만들어진 신간회는 회원들이 점점 늘어나고 전국에 지회가 생겼어요.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회원 수는 약 4만 명이 되었고 전국에 149개의 지회가 세워졌어요.


조만식은 평양 지회장이 되어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열었어요.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상황을 널리 알리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12월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어요.




5150af1e0f64374eeb09dbe2522f6ebf_1788222551_8452.png
신간회의 평양 지회장이 된 조만식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간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의견이 대립했거든요. 조만식은 신간회 해체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으나 신간회는 만들어진 지 4년 만인 1931년에 해산되었어요.


신간회가 해산된 후 1932년 조만식은 서울에 왔어요. 조선일보 사장을 맡게 되었거든요.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어요. 조만식은 이를 수습하고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을 펼쳤어요.


조선총독부는 중일 전쟁 후 조만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지원병제도에 적극 협조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조만식은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어요. 그리고 협조를 간청하러 온 일본군에 맞서 한국 청년들의 징병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잠시 구속되기도 했어요.


“조선총독부가 계속 무리한 일을 시키려 하는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고향으로 가서 피해야겠다.”


이 무렵 조선일보의 경영도 어려워지자 조만식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갔어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6 / 1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조만식 목록

조만식 목록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