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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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은 점점 더 폭군이 되어 갔어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어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날로 목이 달아났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왕의 잘못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경연제도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기관을 없앴고, 인재를 양성하던 성균관을 오락 장소로 만들었어요.
연산군은 나랏일을 돌보는 대신 매일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심지어는 도성과 가까운 곳에 백성들의 집을 허물고 자신의 놀이터와 사냥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입구마다 금표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했지요.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어요.

연산군 금표비
비신 앞면 중앙에는 “금표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온 자는 왕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라고 새겨져 있어요.
훈구파도 연산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연산군이 왕이 된 지 12년째 되던 1506년 9월, 결국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어요. 그리고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어요.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고 해요. 반정(反正)은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이에요. 잘못된 정치를 하는 왕을 물러나게 하고 새 국왕을 세움으로써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랍니다.

『연산군일기』
조선의 다른 왕들처럼 실록 체제로 편찬되었지만,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쫓겨나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해 ‘일기’라고 표기했어요.
문화재청
중종은 연산군 때의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중단된 경연을 다시 시행하고 홍문관, 사간원을 복구시켰어요. 수없이 설치된 금표도 철거했죠. 물론 중종은 훈구 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간섭을 피하기는 힘들었어요. 훈구 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지요.
그렇게 8년이 지난 무렵, 정치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중종은 향촌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사림들을 등용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조광조를 등용해서 개혁 정치를 펴나갔어요.
조광조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추천받아 시험을 치른 뒤 관리로 뽑는 ‘현량과’를 실시했어요. 현량과로 선발된 관리는 대부분 사림 출신으로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큰 힘이 되었지요.
조광조는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교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하였어요. 조광조가 보기에 유교 국가에서 도교신에 대한 제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또한 지방 곳곳에 성리학의 기본 윤리가 담긴 『소학』과 지방 자치적 규약으로서의 ‘향악’을 보급하였어요.
이 밖에도 농민을 가장 괴롭히던 공물(왕실과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지방에 부과하던 것)의 폐단을 고쳐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어요. 이러한 그의 개혁 정책은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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