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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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대구를 거쳐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는 큰언니와 고모가 살고 있었거든요. 김마리아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여러 장 복사한 후 서울로 가져갔어요.
그 무렵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김마리아는 3월 2일 이화학당에서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만났어요. 앞으로 독립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남학생들은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여학생들도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김마리아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부인 단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러나 부인 단체를 만들려는 그들의 결심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3월 6일 김마리아가 3·1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지요. 김마리아는 이때 심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갇혀 있다가 7월 24일이 돼서야 가석방되었어요.
그 무렵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김마리아는 3월 2일 이화학당에서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만났어요. 앞으로 독립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남학생들은 크게 운동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여학생들도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김마리아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부인 단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러나 부인 단체를 만들려는 그들의 결심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3월 6일 김마리아가 3·1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지요. 김마리아는 이때 심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갇혀 있다가 7월 24일이 돼서야 가석방되었어요.

김마리아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는 큰 변화가 생겼어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이죠. 그러자 국내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하는 단체가 하나둘씩 생겨났어요. 그중에는 ‘혈성애국단부인회’,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처럼 여성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있었어요.
‘혈성애국단부인회’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들어진 비밀여성단체로 김마리아와 같이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한 오현주가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이 단체는 3·1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일과 같이 옥바라지와 같은 일을 했어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1919년 4월에 만들어졌어요. 최숙자, 김원경 등 기독교계 여성들이 만든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했어요. 또 5월에는 김원경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내기도 했어요.
두 단체는 각각 나뉘어 활동을 하다가 대한청년외교단의 이병철의 제안으로 하나로 합쳤어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예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장은 오현주가 맡았지만 곧 사임하여, 회원들은 1919년 10월 정신여학교에 모여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선출했어요.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기존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즉 이전처럼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보내는 활동만 할 것이 아니라 독립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보내던 재무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결사부와 적십자부를 새로 만들었어요.
특히 적십자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독립 전쟁을 하게 되면 발생하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대한민국적십자회를 조직하자는 판단에 따라 만든 것이에요. 김마리아의 지도력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회원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만주와 하와이에도 지부가 설치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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