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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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을 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잡을 궁리를 했어요. 그런데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의 군대가 있어 쉽지 않았어요. 개화당은 충분한 군사력이 없었거든요. 또 정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돈도 충분하지 않았고요.
“우리 일본이 군사 150명과 3백만 엔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거사에 도움을 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김옥균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치권력을 잡으려 했어요. 그러던 중 좋은 기회가 생겼어요. 정변의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청의 군대 일부가 조선에서 철수했거든요. 이 무렵 청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어요. 그래서 조선에 주둔한 3,000명의 군인 중 절반인 1,500명이 조선에 남게 되었어요. 일본이 도움을 준다는 군사력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옥균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어요.
“불이야!”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근대적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총국이 문을 여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부근의 한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밖에 나갔던 민영익이 정변 세력에 의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어요.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잔치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건물을 빠져나갔어요.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창덕궁에 있던 왕과 왕비에게 청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피난을 가야 한다며 왕과 왕비를 모시고 경우궁으로 갔어요.
정변을 일으킨 다음 날 아침 개화당은 고종의 허락을 받아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어요. 한편, 왕비는 지난밤에 일어난 사건을 청의 군대가 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 청과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왕비는 경우궁이 비좁다며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김옥균은 창덕궁이 너무 넓어서 청의 군대가 오면 지키기 쉽지 않다고 반대했어요. 그러나 왕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개화당은 하는 수 없이 왕과 왕비의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겼어요.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되던 12월 6일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안을 발표했어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개혁안
그날 오후 청의 군대가 창덕궁으로 들이닥쳐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어요. 얼마간의 총격전이 끝나고 일본 군인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스스로 지킬 군인이 많지 않았던 개화당도 일본 군인을 따라 창덕궁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갑신정변은 일어난 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답니다.
그 후 개화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변의 실패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어요. 특히 홍영식은 고종을 끝까지 모시고 있다가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또 김옥균과 박영효 등 9명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어요. 이로써 개화당 세력은 한동안 조선에서 살 수 없었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동안 조선에서 개화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기 힘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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