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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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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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던 이회영은 1913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어요. 부족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고종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시키기 위해서였지요. 망명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박해를 피하고자 다른 나라로 몸을 옮기는 것을 말해요. 베이징에 있던 이시영이 고종이 살 곳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고종의 망명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 후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베이징에서의 독립 운동은 쉽지 않았어요. 독립자금으로 가져온 돈이 바닥나서 생활이 무척 힘들었거든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버티고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못해 차가운 방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회영은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어요.

그러던 중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어요.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자 그곳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점 어려워졌어요. 당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이회영은 만주의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그곳에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가기로 했어요. 이회영의 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그의 굳은 결심을 꺾지 못했어요.


마침내 이회영은 1932년 11월 배를 타고 다롄 항을 향해 떠났어요. 그런데 이회영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어요. 일본 경찰은 조선인 밀정을 통해 이회영이 이곳에 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거예요. 감옥에 갇힌 이회영은 모진 고문을 받다가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이회영의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산을 지키기 위해 귀국한 첫째 형과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을 제외한 형제 대부분이 중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이시영은 이회영이 죽은 후에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어요. 특히 그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어요.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귀국하였고,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이 되어 활동했어요.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사용했어요. 또 자신들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았죠. 사람들은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슨 뜻이냐고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이회영과 같은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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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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