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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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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회영,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다
한양의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다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
만주에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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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다
이회영 집 터(서울 중구)“형님, 그리고 아우님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네 말이 맞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우리 식구 모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자고 주장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만주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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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08-31
5
한양의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다
이회영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형제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에요. 이회영은 1867년 서울의 저동에서 태어났어요. 이회영이 태어난 저동은 오늘날 서울의 중심지인 명동 일대에요.이회영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어요. 덕분에 이회영의 형제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다른 양반집 자제들처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했구요. 그러나 이회영은 형제들과 달리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어요.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기쁜 일이 생겼어요. 동생인 이시영이 문과에 급제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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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08-31
4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다
청년이 된 이회영은 근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더욱더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나갔고, 조선이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한 근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부터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했어요.“석영 형님은 집에 계신가요?”“예, 계십니다. 아니 그런데 저희같이 노비에게 왜 존댓말을 하시나요?”“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당연한 일이지요.”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집안의 노비들을 자유로운 신분으로 풀어주었어요.노비를 풀어주는 이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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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8-31
3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부터 호시탐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어요. 바로 청일 전쟁(1894년~1895년)과 러일 전쟁(1904년~1905년)이에요. 두 전쟁은 모두 일본의 승리로 끝났어요.특히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했어요. 그 중 가장 먼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았어요.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우리에게 을사늑약(1905년)을 강제로 맺도록 했어요.을사늑약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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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08-31
2
만주에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다
1910년 12월의 어느 날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집에 모여 회의를 했어요. 그들은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가기로 정했어요. 그리고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땅을 비롯하여 자신들이 살던 집 등 전 재산을 팔았어요. 너무 급하게 땅을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이회영은 1910년 12월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를 향해 길을 떠났어요. 먼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갔어요.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10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목표로 한 만주 삼원보 근방까지 갔어요. 이곳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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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8-31
1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길러내던 이회영은 1913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어요. 부족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고종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시키기 위해서였지요. 망명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박해를 피하고자 다른 나라로 몸을 옮기는 것을 말해요. 베이징에 있던 이시영이 고종이 살 곳을 마련했어요.그런데 고종의 망명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 후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베이징에서의 독립 운동은 쉽지 않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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