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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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땅에서도 역사 연구는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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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신민회는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무관학교를 만들기 위해 신민회 간부 일부를 중국으로 망명시키기로 하였어요. 이에 신채호도 가족을 뒤로 한 채 압록강을 건넜어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망명길에도 신채호의 등짐 보따리 속에는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 이라는 역사책이 들어 있었어요. 그는 『동사강목』을 소중히 여기며 읽고 또 읽었어요. 그에게 역사 연구는 또 하나의 독립 투쟁이었어요.


“비록 나라를 잃은 몸이지만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직접 발로 밟아 보며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겠노라.”

1914년 신채호는 서간도의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어요. 그리고 틈만 나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찾아다녔어요.


어느 날 신채호가 고구려 옛 땅인 중국 길림성 집안현(국내성)에 갔을 때였어요. 곳곳에 몇천 개의 왕릉과 귀족의 무덤이 있었어요. 광개토대왕의 능묘도 있었어요. 능의 크기를 잴 기구가 없어 자신의 팔과 발로 능의 둘레와 높이, 넓이를 쟀어요.


“이 많은 유적을 버려두고 고구려와 발해를 왜 우리 역사에서 빼려고 했는가! 왜 우리나라가 반도 안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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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답사를 통해 역사를 연구한 신채호




신채호는 고구려의 역사 유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어요. 그리고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한층 깊이 연구하였지요.


이후 신채호는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곳에 있을 때는 베이징대학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많은 역사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할 수 있었어요.


1924년 신채호는 그동안 작업해 왔던 조선사 연구를 정리하여 『조선사』의 총론을 완성하였어요.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어요.


1925년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 등의 역사 논문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어요. 그는 일련의 역사 논문들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신채호는 중국, 만주, 연해주를 돌아다니는 힘든 망명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온 힘을 쏟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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