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신돌석이 의병을 이끌다
본문
1906년 스물아홉 살이 된 신돌석에게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신돌석은 그해 자기 고향인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에서 10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어요. 그는 ‘영릉 의병’이라 의병의 이름을 짓고 의병장이 되었지요.

신돌석 생가(복원, 경북 영덕군)
문화재청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뒤 가장 필요했던 것은 근대 무기인 총이었어요. 일부 사냥꾼들에게 총은 있었지만, 최신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요. 우선 신돌석은 신무기 확보를 위해 1906년 4월 영양읍 관아를 기습했어요.
“수백 명이 각각 총포를 들고 들이닥쳐 사방으로 발포하고 순교청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무기 창고에서 총, 탄환, 화승총, 화약 등을 갖고 영해로 향했다.”
관아에서 빼앗은 무기로 무장한 신돌석은 영덕·울진·경주 등의 경상도 일대와 삼척·강릉·양양 등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었어요. 의병과 일본군의 총의 사정거리는 무려 100미터나 차이가 났어요.
무기 성능에서부터 이렇게 차이가 커서 평지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면 의병들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신돌석은 산악 지형을 이용해 재빠르게 움직이며 기습 공격을 펼쳤지요.

의병 무기(위)와 일본군 무기(아래), 신돌석 유적지 기념관
신돌석은 일본군을 꾸준히 괴롭혔고, 그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어요. 일본군은 신돌석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어요. 일본군은 그를 신출귀몰한 인물로 여겼어요.
심지어 ‘신돌석 의병 부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해요. 신돌석의 활약으로 의병은 3,000여 명까지 늘어났어요. 어느덧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지요.
평민 의병장으로서 신돌석의 신출귀몰한 활약은 일반 백성들에게 항일 의식을 한층 더 높여주었어요. 군대 해산 이후 군인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운동은 이제 유림 중심을 넘어서 전 민족의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어요.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