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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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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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은 감옥에서 4년간 있다가 1915년에 석방되었어요. 일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평안남도의 한 시골에서 살게 하며 감시했어요. 양기탁은 일제의 눈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여 만주로 가서 사람들을 모아 독립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1918년 중국 톈진에서 일제에 붙잡혔어요. 양기탁은 다시 전라도의 한 섬에서 갇혀 2년간 지냈어요. 그곳에서 3·1 운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양기탁은 3·1 운동이 끝난 후 풀려나 다시 서울로 왔어요.


“선생님!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고문을 맡아서 신문 발행에 도움을 주십시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던 경험을 되살려 신문을 펴내는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어요.


1921년에는 미국 국회의원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역에 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다 다시 체포되었어요. 양기탁이 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그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외출이 특별히 허락되었어요. 양기탁은 이 기회를 이용해 다시 만주로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독립군 단체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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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표(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있는 양기탁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만주에서 활동하던 양기탁은 1922년 여러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를 창설했어요. 그 후 정의부에서도 활동을 했어요. 정의부는 1924년에 만들어져 만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어요.


1930년대 양기탁은 만주를 떠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했어요.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 정부는 일제를 피해 중국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193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이자 대표인 국무령으로 선출된 양기탁은 임시 정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힘을 보탰어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러 독립운동 정당이 들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어요. 이 때 양기탁은 조선혁명당 대표로 독립운동 정당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펼쳤어요.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하던 양기탁은 몸이 쇠약해져 1938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그 후 55년이 지난 1993년 우리 정부는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어요. 양기탁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조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어요.

양기탁은 청년 시절 영어공부를 좋아한 개화파 청년이었어요. 그러다가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려 하자 이에 맞서 실력양성운동, 독립군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 운동을 펼쳤어요. 양기탁이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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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우강 양기탁의 묘역(국립서울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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