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일본으로부터 한양을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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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어요. 한일 신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많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강한 전투력을 갖게 되었어요.
원주에서 활동하던 이인영 의병장은 전국의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함께 한양으로 진격하기를 호소하였어요. 이인영의 격문에 1만 명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모였어요. 연합의병부대 ‘13도 창의군’은 부대별로 나뉘어 한양으로 진격하여 같은 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했어요.
13도 창의군 선발대 300명이 동대문 밖 30리(약12km) 지점까지 접근하였어요. 이때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의병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의병 선발대가 동대문 방향으로 접근하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어요. 선발대는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후속 부대와의 연락이 끊기고 고립되자 결국 후퇴하고 말았어요.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어요.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어요. 일본은 의병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의 마지막 방해물이라 생각했어요. 일본은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어요.
특히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인도까지 샅샅이 뒤지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어요. 이 작전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어요. 살아남은 의병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연해주나 간도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어요.
의병 중심의 무장 투쟁도 정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때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나 일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요. 하나는 대한제국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에 왔을 때 의병장 안중근이 저격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에요.
뒤이어 대표적인 친일파 대신 이완용을 이재명이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는 사건도 발생했지요. 국권 침탈에 앞장섰던 두 인물을 처단해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지사의 항전이었어요.

1915년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京城協儧會報告(1916)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긴다.
-〈한일병합조약〉 제1조(1910)
부상에서 회복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어요. 일본의 군사적 점령하에 무력으로 강요된 이 마지막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경술 국치,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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