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교육 구국 운동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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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은 잡지를 통해서도 대중 계몽 운동에 힘썼어요. 1906년 4월에 조직된 대한자강회에 참여하여, 기관 신문인 『대한자강회월보』에 논설을 썼어요. 특히 논설을 통해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을 깨우치고자 하였어요.


“나라는 우리의 큰 가족이다. 만약 그 가족의 정신이 완전하지 않으면 다른 가족의 압제와 유린을 당한다. 그러니 국민의 교육을 발달시켜 실력을 키우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또 1906년 관서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우학회를 조직하고 기관 신문인 『서우』의 발행을 맡았어요. 『서우』에서는 교육의 진흥을 위해 사범학교와 의무 교육의 시급함을 역설하였어요.


“교육 방침에 대해 최우선 급선무는 사범학교의 양성이다. 대개 학생은 국가의 기초이고 어린아이들의 공부는 학생의 기초이다. 이들이 없으면 어찌 온전한 국가가 있으리오?”


1908년 서북인 중심의 서우학회와 관북인 중심의 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서북학회가 창립되었어요. 박은식은 초대 회장직을 맡으면서 서북학회의 회지인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도 활동하였어요.

박은식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며 과학 기술을 연구하여 실질적인 문물을 만들어 내는 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어요. 지금 나라를 살릴 사람들은 학문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지요.


“누가 우리나라를 구할 자이며, 누가 우리 민중을 살릴 자인가. 실업학가(實業學家)가 이들이다.”


박은식은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 결과 서울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가 설립되었지요. 박은식은 이 두 학교의 교장을 맡아 신교육과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에 63개의 학교를 설립했어요.


한편 일본은 한국의 유교 단체를 자기들 편으로 만들려 하였어요. 이에 맞서 1909년 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립하였어요. 그리고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의 발표를 통해 유교계의 개혁을 촉구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어요.


이와 같이 박은식은 이 시기에 민족의 역량을 모으고 기르는 데 온 힘을 쏟았기 때문에,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애국 계몽운동가라 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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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월보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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